올무인가, 도약판인가?
성주진 목사/ 합신 구약신학 교수
최근 들어 “나는 헛살았다”라는 푸념을 종종 듣습니다. 부동산가격 급등
이 낳은 심각한 부작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아파
트값과 땅값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
겨 주고 있습니다. 뭔가 내놓을 만한 업적이 없는 터에, 재산이라도 변변히
모아놓지 못한 지난 삶에 대한 회한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지나간 과거를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경
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재산으로 인한 상실감은 아닐지라도 낭비된 삶, 허비
된 시간, 그리고 다양한 실패와 좌절이 불러온 죄책감은 그리스도인의 양심
을 괴롭히기 일쑤입니다. 크고 작은 죄책감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인국의
밧줄에 매인 걸리버처럼 무력하게 만들고 결국은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마저
도 작아 보이게 만듭니다.
과거의 실패와 좌절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면 어쩔 수 없
n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열악한 여건 때문에 생긴 일
이라고 생각한다면 과거를 그대로 수용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상처는 더
욱 깊어지고 나은 듯 하다가도 비슷한 환경에 부닥치면 다시 도지고 불거지
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런 과거는 자유를 속박하는 올무입니다.
과거의 올무를 깨뜨리고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처와 왜곡
으로 점철된 과거와 화해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관건은 화해하는 방법입니
다. 과거와 화해하고 과거를 수용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상처는
합병증을 일으키고 과거의 멍에는 계속해서 믿음의 자유로운 비상을 방해할
것입니다. 물론 과거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과거와 화
해하는 문은 항상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과거를 수용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
를 들려줍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하다가 끝내는 애굽에 종으로 팔아
넘긴 형들을 용서하는 일은 요셉에게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를 용서하기에 앞서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형제의 악의가 아
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자기 고난의 궁극적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요셉은 한없이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 형제들을 진정으로 용서
할 수 있었습니다.
모압 평지에서 행한 모세의 설교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화해시키
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아버지 세대의 죽음을 경험한 백성들에
게 광야의 경험은 심판이요 낭비된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광야
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시기였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모든 것
이 턱없이 부족한 광야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들
은 광야의 결핍과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한 것입니다. 광
야 경험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에서 하나님과 화해
하고 언약을 갱신하며 새로운 헌신을 다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일도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스
라엘 백성에게 성전의 소실만큼 커다란 충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
루살렘을 망하게 놔두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영원한 언약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혀온 현실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의로
우심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화해를 향한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언약에 의거한 하나님의 정당한 처벌이라는 점을 인정
하였습니다.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임으로 인정함으로 새로운 시작
을 기약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본 표면적인 현상만이 과거의 전부가 아닙니다. 과거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는 하나님의 진리만이 과거의 실패와 상처 때문에 사랑이 식어
지고 믿음이 연약해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과거의 멍에에서 벗
어나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과거와 화해를 이루는 과정
에서 잠 못 이루는 수많은 밤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과의
화해는 과거의 상처가 더 이상 우리를 옥죄는 올무가 아니라 자유롭게 도약
하는 발판이 되도록 만들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