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길, 십자가의 역설_성주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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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길, 십자가의 역설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패자부활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합에서 계속 이기는 사람은 승리가도
를 달려가는 반면 중도에 탈락한 사람은 패자부활전을 통하여 회생을 꿈꾸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은 패자의 회생이 아닙니다. 능력있는 사람은 
자기 실력으로 올라가고, 뒤떨어진 사람은 은혜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
다.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십자가의 죽
음을 통과하지 않고는 부활의 생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십자
가의 역설에 기초한 보편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역설은 죄의 망각과는 거리가 멉니다. 세상은 죄와 상처
의 망각을 구원과 치유의 방법으로 이해합니다. 여러해 전에 ‘상처와 치
유’라는 주제의 현대미술전을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이 남
는 작품은 한 여인의 이미지가 아날로그적 복제의 반복을 통하여 왜곡되고 희
미해져 가는 현상을 보여준 비디오 설치작품이었습니
다. 이 시대의 구원은 
상처가 ‘복제와 시간의 흐름에 의해 변색되고 퇴조되고 잊혀지는’ 데 있다
는 말일까요? 아마추어적 용기를 빌어 해석한다면 시간과 망각이 시대의 상
처를 치유하는 양약이라는 주장같이 보입니다. 

이런 식의 해결방식은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방법과 다릅니다. 죄에 대
한 기독교의 해결책은 죄의 사실을 부인하거나, 망각하거나, 억압하지 않습
니다. 오히려 죄의 사실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드러냅니다. 그럴 때에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잊으시고, 우리의 기억을 치유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망각하면 하나님은 기억하시지만, 우리가 죄를 기억하면 하나님은 망각하십
니다. 죄의 문제는 십자가의 역설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적당한 죄책감은 은혜가 된다”(스캇 펙)는 말의 의미입니다. 인간
은 보통 죄책감을 깊숙이 숨기고 죄를 교묘하게 부정하는 성향을 따라서 살아
갑니다. 그것이 해결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죄의 문제를 키울 뿐입니다. 죄의 사실을 직시하는 정당한 죄책감을 은혜의 
표(sign)로 받아들이고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죄책
감은 오히려 하나님이 죄
인들과 함께 하시는 증거가 됩니다. 십자가의 역설은 심각한 죄책감 가운데
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를 읽게 하는 부활의 시각을 내포합니다.

십자가의 역설은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좋아합니다. 십자
가를 통과하지 않고도 부활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이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특수한 지식이나 믿음, 또는 경험만 소유한다면 자기를 부인
하지 않고서도 좋은 제자가 될 수 있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도 주님
을 지근거리에서 모실 수 있으며, 주님의 멍에를 메지 않고서도 온전한 쉼
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힘든 고난의 과정 없이 종교적으로 ‘성공’하
는 사람들을 내심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성공주의 영성
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십자가의 역설로서의 부활은 특수한 삶의 정황에서가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성도들이 좋아하는 성구 가운데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일까요? 믿음 없음
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 자체가 큰 믿음입니다. 모순처럼 보
이는 이 말이 사실은 믿음의 역설을 그림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와 함께 부활한 성도가 날마다 죽어야 하는 역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부활절 달걀의 전통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삶은 달걀이 부활
을 상징할 수 있을까요? 달걀의 죽음은 새 생명의 배아를 죽이는 것이 아니
라 배아의 탄생을 위하여 ‘썩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은 달걀에서 
병아리가 깰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아이들은 십자가의 역설과 부활의 원리
를 제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삶는 것은 생명을 위하여 ‘썩는’ 것이 아니라 
한 알 그대로 있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십자가의 죽음이라
는 역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