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혹시’의 하나님
성주진교수/ 합신 구약신학
제목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우연’과 ‘혹시’라는 말
이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왜곡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한 두려움
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삶의 경험을 그대로 반영하는 말들이 성경에 그대로 사용되
고 있는 사실이 오히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이지요.
이러한 당혹감은 갈렙 이야기를 대할 때에 느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수14:12)이라는 말은 전제가 아닌 강한 가정처럼 들
리는데, 이렇게 확신이 없어 보이는 태도는 갈렙같이 뛰어난 믿음의 사람에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가능성을 가리키
는 ‘혹시’라는 단어가 엄연히 나와 있습니다.
비슷한 당혹감이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는 장면(룻2:3)을 읽을
때에도 감
지됩니다. 이 사건은 장차 룻이 보아스와 결혼에 골인하여 다윗의
조상이 되는 시발점을 이루고 있는데 이 중대사가 ‘우연’이라니, 하나님의 섭
리임을 아는 우리로서는 적잖이 당황하게 됩니다. 우연은 섭리의 반대가 아니
던가요.
이에 대한 설명은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우선 룻의 ‘우연’은 그녀가 아무
런 사전계획이 없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우
연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놀라운 계획을 이루셨다는 룻기의 증언은 인간
의 우연은 하나님의 필연이라는 섭리의 특성을 그림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연은 섭리의 반대가 아니라, 섭리라는 자수의 뒷면입니다.
갈렙의 ‘혹시’도 흔들리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긴
장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에 맡기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갈렙은 열린 칼빈
주의자입니다! 갈렙의 혹시 때문에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비현실적인 승리주
의 교과서로 보지 않고, 믿음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친절한 안내서로 읽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사실적인 ‘혹시’를 대할 때 마치 속마음을 들킨 사
람처럼 당황할까요? 우리말 ‘혹시’가 가지는 부정적 뉴앙스 외에, 우리의 믿
음이 지나치게 확실한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내 소원대로, 내 계획대로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자유를 받아들이면 그분은 내가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
하시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나 믿음의 본령은 하나님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 자유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가 체험하는 불확실한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확실한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연’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사실 필수적인 삶의 조건들은 다 ‘우연히’
주어진 것입니다. 나의 부모, 나의 외모와 성격과 지능 등은 내가 계획하고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나에게 ‘그냥’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네 삶도 많은 경
우, 환경과 다른 사람의 행동,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의 임의적인 행동의 결
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룻의 우연은 이러한 삶의 자리 또한
하나님이 일
하시는 거룩한 현장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연은 섭리의 자료이자, 씨줄
과 날줄입니다. 따라서 우연의 현장을 버리면 하나님의 역사를 놓치기 쉽습니
다.
이렇게 ‘우연’과 ‘혹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방식을 잘 보여줍
니다. 물론 우연과 혹시의 이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은 인간
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서 모든 불확실한 요소를 제거하려는 인간적 노력은 잘못하면 하나님의 광활
한 신비를 내가 아는 협소한 지식의 수준으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신
비를 제거당한 하나님, 이는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타락한 지성
이 만들어낸 우상입니다. 반면, 바로 이해된 우연과 혹시는 우리의 믿음을 심
화하고 강화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지나쳐버리기 쉬운 우연과 혹시가 실은
얼마나 귀하고 신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에 맞닿아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