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대안을 찾아서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이라크 전쟁이 끝난 지금, 과연 누가 승리자이고 누가 패배자인가를 묻게 됩
니다. 혹시 진정한 승자가 없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이번 전쟁의 최대 피
해자는 무고한 희생자들과 더불어 기독교, 그것도 보수적인 개신교가 아닌가
합니다.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특히 중동국가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상당한 타
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아픔과 부담을 안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기독
교적 대안의 문제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당사국들은 자국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여러 논리를
동원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논리는 역시 흑백논리
입니다. 미국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는데, 여기에는 자국이 무고
한 폭력의 희생자일 뿐만 아니라 정당한 공의의 심판관 및 집행자라는 자기인
식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후세인 독재정권은 미국은 사악한 침
략자, 곧 사탄이기 때문에 이에 맞서 싸우는 것은 성전
이라고 주장합니다. 전
쟁상황에서 당사국들은 대개 이원적 선악대결의 구도에서 명분을 찾습니다.
당사국들의 흑백논리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제삼국은 흔히 양비론 또는 양
시론을 표방합니다. 둘 다 나쁘다든지, 둘 다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곤혹스러
운 상황을 돌파하려고 합니다. 사실 이 땅에는 절대적으로 선한 국가나 절대
적으로 악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양비론과 양시론은 언제나 가능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판단과 실천적 결단이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상
황에서 두 논리는 손쉬운 현실도피 수단으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제3의 대안은 없을까요? 혹시 미국은 자국의 ‘진정한 힘’을 보여줄 좋은 기
회를 놓치지 않았을까요? ‘중생한’ 지도자들이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을 충
실하게 따랐더라면, 지구촌의 목소리에 좀더 귀를 기울였더라면, 전쟁의 결과
를 좀더 심각하게 고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성경은 역사의
진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만, 흡사 옛날 로마 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대안은 적나라한 힘의 과시와 요지부동의 흑백논리
앞에서 무력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흑백론과 양비
론의 한계를 뛰어넘어 갈등을 해소하고 구원을 이루는 제3의 신학적 대안을
제시하는 사실에 환호하게 됩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제기한 예배처소의 문제
는 동시대인이 직면한 종교적 흑백논리의 한 예입니다: ‘예루살렘인가? 사마
리아인가?’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대안을 제시합니다: ‘아버지께 참으
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개역개정).
그리스도가 오신 이상 예배는 더 이상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에배는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성취이신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
됩니다.
윤리의 영역에서도 기독교적 대안제시의 필요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가져다 줍니다. 예를 들어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양론은 우리로 ‘사형이 성경
적인가, 아닌가?’ 자문하게 만듭니다. 구약에 언급된 사실만을 근거로 사형
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한, 이 주제는 간단한 흑백논리의 문제가 아
닙니다. 정의의 실현과 법과 질서의 유지 못지 않게 생명의 존엄성, 회개의
r
기회 부여 및 오심의 가능성도 중요한 고려사항입니다. 이 경우에 사형은 선
고하되 집행은 유보하는 방안은 정의의 요구와 사랑의 실천을 만족시키는 기
독교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세상에 맥없이 굴복하거나 경직된 대결주의로
치닫지 않고 믿음으로 지혜롭게 상황에 대처하는 일은 실천불가능한 이상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왕의 진미를 앞에 두고 무조건 순응하거나 어설프게 순교
적 자세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 당면한 난관을 극복하고 이방인들에
게 다가갈 수 있는 제3의 창조적 대안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
습니다.
날로 복잡해져 가는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하여 결정
하고 실천할 것을 끊임없이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단적 흑백론
과 무책임한 양비론을 넘어 믿음과 사랑과 진리의 대안을 실천함으로써 하나
님 나라의 진정한 역동성을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