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튼과 폴러첸_성주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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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튼과 폴러첸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북한주민의 생존과 복지, 탈북자의 인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남북한의 통
일을 위하여 한국교회와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많은 활동가들이 국내
외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 대열에는 고맙게도 외국인도 합류하
고 있는데, 두 사람만 예로 들어보라면 스티브 린튼과 노베르트 폴러첸을 꼽
을 수 있을 것입니다. 

린튼은 구한말 미국 선교사인 유진벨의 외손자로 현재 북한의 결핵퇴치에 진
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북한(당국)과의 관계를 ‘손님-주인’의 관계로 
규정하면서, 이 패러다임에 맞추어 자신의 활동의 범위와 성격을 조심스럽게 
설정합니다. 정치 문제에 대한 불간섭, 자립을 위한 협력, 상대방의 자존심 
중시 등이 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결핵퇴치 등의 사업을 위하
여 북한을 60여회 방문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역원칙에 대한 북한당국의 신뢰
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폴러첸은 4년전에 독일의 ‘긴급의사회’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하였습니다. 
초기에는 ‘공화국 친선메달’을 받는 등 큰 신임을 받았으나, 그의 인권요구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북한당국에 의해 사실상 추방당하고 맙니다. 그의 대
북관과 활동을 규정짓는 원형적 경험은 나찌 독일의 유대인수용소입니다. 그
는 침묵의 죄를 무겁게 의식하는 독일인으로서 북한의 실상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이 변화의 지름길인 줄 믿고 대중과 언론의 이목을 최대한 집중시키
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두 접근방법의 논리와 전략은 자못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두 방법은 서로 
모순된다기보다 다면적 이해와 추구라는 연구과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
다. 오히려 우리는 전제된 공통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방법론은 민
족을 사역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습니다. 외국인이니까 당연할 수도 있겠지
만, 이들에게는 분명 민족의 논리를 넘어서는 사랑과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
념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민족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옵니다. 민족은 하나님의 세상경륜에
서 기본 틀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유다 민족에 갇혀있
지 않고, 민
족과 국가를 아우르는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 사이에 구별이 없
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지 못하는 이 시대에서 통일논의는 민족을 
중심적 위치에 두어야 하지만, 이러한 자리매김은 편협한 민족주의나 무분별
한 통일지상론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민족의 논리가 지나치
면, 경직된 민족주의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보다 넓은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웃에 대한 가르침은 좋은 출발점입
니다. 여기에서는 민족의 같음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의 절박한 필요와 
이웃이 되라는 가르침이 강조됩니다. ‘지구촌’이라는 한 마을에 사는 우리 그
리스도인은 민족의 원리와 더불어 사랑과 정의라는 보편적 원리를 놓치지 말
아야 할 것입니다. 

청지기론도 중요한 전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언가를 주신 것은 나
만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자와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 나눔의 원
리는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 간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충성된 청지기는 아까워서 움츠리
기보다 나눔의 통로가 되었음을 기
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가르침도 귀한 안목을 제공합니다. 인간은 타락후
에도 여전히 제한된 의미에서나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전히 
인간됨을 소유한 존재, 돌이키면 언제라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가
능성의 존재로 보는 인간관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다대수의 북한주민을 ‘인간
적으로’ 이해하고 선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성경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지금은 낭만적인 통일론에 막연하게 안주할 때가 아니라 실제적인 통일을 구
체적으로 준비해야 할 때인 줄 합니다. 경제적인 준비만 가지고는 다 되었다
고 말할 수 없습니다.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지 않는, 상대적으로나마 도덕적 
정당성과 사랑의 능력을 소유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요긴하다고 봅니다. 그리
스도인은 이 일에 공헌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예
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구세주요 의로우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