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라는 이름_성주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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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악마’라는 이름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한국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Red Devils)’가 이번 2002 월드컵에서 한국 축
구팀의 선전과 함께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12번째 선수임
을 자임하는 ‘붉은 악마’가 주축이 되어 펼친 열띤 응원전은 전세계의 수십
억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사실 ‘붉은 악마’는 기독교인들에게 껄끄러운 이름입니다. 하고많은 말 중
에 하필 ‘악마’라니. 게다가 빨간 티셔츠에 쓰여진 ‘Be the Reds’라는 로고
는 ‘붉은 악마가 되라’는 뜻입니다. 회원이 되라는 캠페인의 일환이겠지요. 
이런 로고가 새겨진 빨간 티셔츠를 입고 악마의 ‘뿔’까지 동원되는 자리에서 
응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붉은 악마’가 되어 버리는 셈
입니다. 
이런 난처함 때문에 몇몇 기독교 단체에서는 응원단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직접 요청하거나, 기도회나 기자회견을 열기도 
하며, ‘하얀 
천사(White Angels)’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만, 결과는 신통치 않
았습니다. 이제 세계인들은 한국축구 선수들의 뛰어난 실력과 한국민의 열정
적인 응원을 ‘붉은 악마’와 연결시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말은 의미를 담는 그릇이요, 언어는 사유제약성을 갖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응원단을 ‘악마’라고 이름한 것은 단순한 지시적 의미를 넘어 내포적인 의
미도 전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이냐가 관건입니다. 영
어 ‘devil’은 오래 전부터 일상화된 표현이 많아서 ‘Be a devil’은 ‘겁내지 
말고 악착같이 싸워라’는, 종교적으로 상당히 탈색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우리말의 ‘악마’는 아직 그렇게까지 탈색된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특
히 구약시대를 상기시키는 말들, 예를 들면 성전, 새벽 제단, 출애굽 작전, 
여리고 작전, 가정의 제사장 등의 용어를 사용할 때 의도하지 않은 의미들이 
따라 들어와서 마치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은 것처
럼 생각하게 되는, 원
치 않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언어의 사유제약성 때문입니다.

시장에서의 말도 미묘하게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사장님, 회장님’, ‘사모
님, 어머님’을 연발하면서 손님에게 부여된 이미지에 걸맞은 상품을 구매하라
고 은근히 압력을 넣습니다. 상당수의 상업광고에서는 특정 물품을 사용하면 
멋진 현대인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는 낙오자가 될 것이라고 심리적
인 압박을 가합니다. 이런 경우는 언어의 사유조작성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언어가 잘못 사용된다고 해서 이것이 의미를 최종적으로 결
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의미는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
의 성호가 들어 있는 자기들의 이름 대신에 이방신 명칭이 들어간 이름을 사
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이들은 고쳐진 이름을 목숨걸고 거부하기보다는 그 이름이 무력화시
키고자 하는 ‘여호와 신앙’의 본질을 변함없이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잘못
된 이름으로 불리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작정하고, 실제로 그렇
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된 이름과 상관없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
니다. 그 결과 이들의 바뀌어진 이름이 처음에는 패배의 상징이었지만, 나중
에는 여호와의 승리와 이방신의 무력을 보여주는 기념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참된 신앙은 오히려 잘못된 이름의 의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붉은 악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불편한 이름이고, 또 바꾸었으면 좋을 이
름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모임의 이름에 과도하
게 집착하기보다는, 모임의 내용을 중시하면서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장 우선
적인 본분을 기억하고 힘쓰는 일이 중요한 줄 압니다. 

그렇게 되면 혹 그 이름이 바뀌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교회가 종교적으
로 바르게 차별화되거나 ‘붉은 악마’가 탈색된 의미를 가지게 되어 우리가 우
려하는 바 개념적인 혼란이나 신앙적인 해악이 최소화되고 모임의 사회적 건
전성도 유지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붉은 악마가 되라’는 로고
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라는 도전으로 뒤집어 읽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