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입시철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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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균 칼럼

우리가 바라는 세상 – 또다시 입시철을 맞으며-
또 다시 입시철이 돌아왔습니다. 그 어려운 고등학교 시절 3년을 용케도
잘 견뎌내고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아이들이 대견스럽습니다. 그리고 이제
고등학생이 되려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는 이 아이들이 앞으로 견뎌내
야 할 3년이 훤히 보이는 듯하여 참으로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2-3년 전에 있었던 한 젊은이의 충격적인 자살 사건이 생각납니다. 그는
제 나이 또래의 친구들은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이미 이 나라
최고 수준의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천재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학원에서 성적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고민 고민하던
끝에 결국 자살로 그 아까운 인생을 마감짓고 만 것입니다. 이전에도 나이
어린 학생들의 자살 사건이 심심찮게 있곤 했습니다. 그중 어떤 학생들은
유언까지 남기고 가기도 했습니다. “시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시험의 중압감에 눌리다 못해서 이제는 어디엔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시
험 
없는 나라를 찾아가겠노라며 그 귀한 생명을 던져버리고 이 사회를 떠
나간 것입니다.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획일화 된 가치 기준의 희생자들입니다. 이 사회는
아이들을 학교 성적에 의하여 분류하여 점수와 등급을 매겨주고, 반에서
몇등짜리, 평균 몇점짜리로 아이들을 즐겨 부릅니다. 노래를 잘 하는 아이,
글을 잘 쓰는 아이, 공을 기가막히게 잘 차는 아이, 키가 훤칠하게 큰 아
이, 남을 잘 돕는 아이 등으로 불러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치가 획일화 된 세상은 몹쓸 세상입니다. 부모들은 사회가 그러
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이 사회의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이
되라고 눌러댑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모들이 이 지옥과 같은 세상, 차라리
다른 세상을 찾아 떠나버리고 싶어지는 이런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부
모들 탓입니다.
버드나무의 멋은 축축 휘늘어지는 데 있습니다. 사회가 쭉쭉 뻗은 낙엽송
소나무를 좋아한다 하여 그 멋지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모두 위로 치
켜 세우고, 억지로 철사줄로 묶어매면서 소나무처럼 곧게 자라라고 해대니,
버드나무에게는 그것이 다름아닌 지옥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보
니, 버드나
무는 제 모습을 잃은 꼴불견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버드나무가 내린 마
지막 결론이, “나더러 소나무가 되라고 하지 않고, 나 생긴대로 버드나무
가 되라고 하는 세상을 찾아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소나무만
좋아해도 너는 네 모습대로 버드나무의 멋을 즐기며 버드나무로서 살라”
고 하는 세상 말입니다.
“시험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서 떠납니다.” 그 시험 말고도 더 멋지고,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시험 하나 때문에 이 멋지
게 살 수 있는 인생을 던져버린단 말입니까? 그러나 사실은 시험이 있어서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시험의 결과에 의하여 아이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모든 평가와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그 못된 획일화된 가치판단의 기준이
문제입니다. 학교 성적은 별볼 일이 없지만, 축구인으로서는 한평생을 생기
있고 재미 있게 살 수 있는 아이가 학교 성적 않좋다는 것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있습니다. 음악인으로서는, 미술인으로서는, 만화가로서는, 소설가로
서는, 코미디언으로서는, 영화 배우로서는, 교회 사찰로서는 아주 재미 있
게 보람을 느끼며 살 사람을, 
자기들이 요구하는 그것 한 가지 맞지 않는
다고 버린 자식 취급하고, 필요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이 잔인한 부모들과
이 사회가 지금 간접적인 살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우리
아이들이 바라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소나무로 소나무 되게 하고, 버드나무로 버드나무 되게 하며 인생을 여유
있게 사는 멋쟁이 부모들 어디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