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도,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는가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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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67>

우리의 기도,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는가

이윤호_선교지평 발행인

“메시아에 대한 정당한 인식 없다면 빈 껍질에 불과해”

116문>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답>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신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3부에서 성도의 감사하는 삶을 다루면서 중요한 
두 가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기도의 좌표를 보여주신 
예수님

이러한 맥락 하에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것은 감사
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말로 대답을 시작합니다. 기도는 감사의 행위이
며, 감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은혜의 간구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의미에 대해 보다 세
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근원적인 것들을 소홀히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성전에 올라가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등
장합니다.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기도 중에 감사의 제목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토색, 불의, 간음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은 것과 
자신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
과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고 있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 사람임에 틀림없습
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와는 달리 선민(選民)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 역시 
강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실제로 그의 삶은 하나님께 감사
할 기도의 제목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마태복음 6장에 나타나는 또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떠
올리게 합니다. 이 본문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신분이나 기도의 내용을 언
급하는 대신 그들이 기도하는 모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 좋아하고, 
이방인과 같
이 중언부언 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들의 신분이나 기도의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의 기도에 대한 태도는 앞
서 언급한 바리새인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남이 보는 앞에
서 자랑스럽게 기도하기 좋아했다면 그들이 준수했던 율법의 내용을 열거하
거나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기도를 일컬어 외식하는 기도라 하셨습니
다.
결국 감사의 기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의를 다
른 사람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가식적인 태도를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마땅
히 하나님을 향해 아뢰어야 할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
며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의 감사 기도가 외식으로 여겨진 데는 보
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 멸시했던 세리의 기도와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탄식하는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던 기사를 묵상할 때, 우
리 신앙선배의 가르침 하나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을 알 때 비로소 자아(自我)를 발견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세리의 탄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
지만 바리새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의(義)에 대해서도, 자아
(自我)에 대해서도 올바로 판단하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메시
아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기도는 속이 텅 빈 껍질에 불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감사한 내용은 기껏 일반 종교인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의 간구 역시 중언부언 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
니다. 은혜에 대해서도 올바른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자신은 세리와 같지 않음으로 인해 감사했듯이 우리는 바리새인
과 같지 않음으로 인해 안도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지
불식간에 우리가 비판하는 그들의 전철을 답습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적어도 기도에 있어서는 그러합니다. 
우리가 감사할 내용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로 인한 교회적 삶일 것
입니다. 문제는 구원과 교회는 우리 가운데 가장 많이 거론되는 담화의 주제
이지만 그 의미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
원이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구원받는 것은 매우 쉽다는 생각에 
그치고 맙니다. 그럴듯한 외적 모양을 갖추는 것이 곧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라 여기기 십상입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오묘한 은혜와 구원받은 성도가 기쁨으
로 참여해야 할 교회적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
다. 어쩌면 우리는 합당한 지식을 추구하는데 무척 게으른 풍토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시던 그때처럼 말
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기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바람직
한 현상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기도는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
요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기도하는 자체에 만족한다면 우리도 여전히 바리새인의 기
도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감사와 은혜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
는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이고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
다. 
요리문답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은혜를 간구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 가르침을 온당히 받
아들이기 위해서 무엇에 대해 감사해
야 하고, 간구해야 할 은혜의 내용은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알아가야겠습니
다. 

바리새인처럼 기도하지 
말아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온당한 대화를 바라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