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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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형 목사(광양은송교회)

소요리문답 제10문(4)

문 :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답 : 하나님이 사람을 남녀로 지으시되(창2:24, 말2:15, 마19:4-6), 자기의 
형상대로(창1:27) 지식과(골3:10) 공의와 거룩함이(엡4:24) 있게 지으사 모
든 생물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창1:28).

우리는 지금 사람이 그 원형에 있어서 어떠한가를 배우고 있다. 사람이 원래 
어떠한가를 앎으로써 사람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고 그렇게 되
면 잘못된 현실을 고치려고 하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은 관계의 존재인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
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 떳떳하고 존귀하
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평등하며 만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것
을 다스리도록 되어 있고 부부 관계에 있어서는 질서와 조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원래의 모습이다. 

바로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었으며 그 앞 시간에는 부부관

를 다루었고 첫 시간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일부 다루었다. 오늘은 첫 시
간에 다루었던 부분을 마무리하려 한다.

혹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독교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라 한다. 그러
나 이 명제에는 오류가 있다. 민주주의와 신본주의가 잘못 대조되고 있는 것
이다. 기독교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기독
교는 ‘권위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인 것이다. 민주주의란 하나님께 대한 관
계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
에 있어서 신본주의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결과가 인본주의를 택할 때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일단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존중하고 
폭력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신본주의를 택하게 함에 있어 민주주의적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즉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에 실패한다면 따로 나와야 한다. 민주주
의란 다수결에 의하여 진리를 양보하는 제도가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절차적 정당성이다.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보
다 시간이 더 걸리고 인내심이 필요하다. 대화와 토론이라고 하는 지루한 과
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기독교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개신교가 여러 교파로 나누인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기독교의 
대인적 원리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기독교는 대신 관계에 있어서 
신본주의이기 때문에 저마다 진리를 양보할 수 없기 때문이고 셋째 근본적 이
유는 교회에는 죄와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사적인 대화와 토론의 부
재가 분파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대화와 토론의 부재라고 하는 이러한 그릇
된 비민주적 태도 또한 교회의 오류의 일부이기도 하다. 탐욕이 분리의 원인
이라고 한다면 로마교에는 탐욕이 없어서 외형적 하나됨을 유지하게 된 것인
가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교는 하나됨을 자랑하지만 비진리로 하나됨보다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서
는 불가피하게 나누일 때는 나누이는 것이 낫다. 권위주의의 폐해는 지식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나 오류가 득세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권위주의적 태도를 취하거
나 다른 사람에 대하여 권위주의적 굴종주의
를 택할 때에 인류는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비진리의 억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2000년의 기독교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한편 민주주의가 
성경적 원리임을 성경이 자증하고 있다(마18:1-4, 20:25-27, 행15장, 갈2:11-
14).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존귀하게 지어졌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에 대
하여 교만한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범죄 행위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기
본적으로 평등한 것이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권위
가 존재함을 성경은 아주 부인하고 있지는 않다(엡6:1-4, 벧전5:5-6). 그러
나 이러한 권위는 상당히 제한적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권위도 권위 자체 때
문에 통용된다기 보다는 사리에 맞고 설득력이 있을 때 통용되는 것임에 틀림
없다. 그렇지 않으면 겸손히 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
에게 권위로 누르려는 태도보다는 사랑으로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물며 동역자들 사이랴! 예수님도 자기를 시험하려는 도전적인 질문
들에도 핏대를 올리지 않으시고 겸손히 설명을 가하심으로써 사람들
을 가르치
시고 진리로 인도하지 않으셨던가? 겸손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가장 중요
한 덕목 중 하나이다. 그런데 혼동하지 말 것은 굴종은 겸손이 아니라는 사실
이다. 권위주의에서는 결코 겸손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거기서는 오로지 교
만이나 굴종밖에 나올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