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수상| 정말 중요한 것은 존재의 가치_남웅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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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중요한 것은 존재의 가치

< 남웅기 목사, 바로선교회 >

 

능력가치 추구 골몰하다 존재가치의 영광 잃지 않는 것이 지혜

 

살다보면 별의별 경험들을 다하기 미련입니다. 저는 지난해 12월초, 차량운행 중에 뇌졸중의 급습을 받기도 했습니다.

의식은 말짱한 채 왼팔과 왼 다리가 스르르 풀려버리는 현실적 경험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나이 들어 여러 내과질환으로 서럽던 몸인데 이제 뇌졸중까지 덮치다니 이런 모진 인생역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하심도 즉각적이었습니다. 동승했던 일행들이 기도하며 주무르는 가운데 어느 한 곳 부작용 없이 모든 게 원상회복되었습니다, 응급실 도착 전에 이미 상황이 종료된 ‘30-40분간의 기적’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마지막 순간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붙잡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생명입니다. 그보다 귀한 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레 17:11). 즉 피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와 그 혈관의 건강에 대해 무심합니다. 혹 알고는 있더라도 심상(尋常)히 여깁니다. 우리는 생명과 직결되지도 않는 용모와 의복 등에 대해선 전전긍긍하면서도, 생명 그 자체인 피의 건강에 대해선 소홀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가 참으로 무섭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병들고 무익한 자에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2013년도 한 여름이었습니다. KBS 우리말겨루기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하나님의 알음(신의 보호나 신이 보호하여 준 보람)에 힘입어 ‘우리말 달인’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주위로부터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한글박사’라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저는 다만 잊혀져가는 우리말을 익혀가는 기쁨으로 인해 남보다 조금 더 고유어를 공부했을 뿐입니다. 아직도 한글 맞춤법엔 약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글박사라니 얼마나 듣기에 민망하겠습니까? 이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동일시하는데서 오는 일반적인 오류인 줄 압니다.

공식적인 우리말에는 고유어 외에도 한자어와 외래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글은 우리말과는 또 다른 분야입니다. 말과 글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말은 보이지 않지만 소리가 있고, 글자는 보이지만 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글이 너무 자랑스러운 나머지, 한글만 갈고 닦으면 우리의 얼(정신의 줏대)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얼은 말에 있지 글자에 있지 않습니다, 한글은 소리(얼)를 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널리 쓰이던 대부분의 고유어들이 지금은 사라졌거나 거의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 말(고유어)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말이 없는데 글자만 있으면 뭣 합니까?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한다고 우리말이 되는 건 아닙니다.

몇 해 전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은 자체 문자가 없어 한글을 채용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근데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쓴다고 한민족이 되겠습니까? 문자는 없어도 민족은 존립하지만, 고유한 말과 문화가 없으면 민족은 사라지고 맙니다.

약소국들이 나라는 빼앗겨도 모국어(말)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독립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을 지켜내려는 정책의지를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해방 후 미국의 영향력 가운데 들어가면서 우리는 배고픔은 면했는지 모르지만, 말과 얼을 잊어버린 게 아닌지 두렵습니다. 우리말이 사라지면 우리의 얼이 사라지는 것이고, 언젠가 우리민족이 역사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인생에 있어 육체의 건강도 중요하고 민족의 얼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건 우리의 영혼세계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보혈로 하나님 아들이 되었고, 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자랑은 그 능력의 탁월함에 있지 않고, 그 존재의 구별됨에 있습니다. 교회는 영생을 노래하는 곳이요, 하나님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구별되고 거룩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영광의 교회요 영광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본질은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즉 교회와 성도는 내 것을 자랑할 여지가 없습니다. 나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자랑하는 순간, 인간의 영광은 모래성이 되어버립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의 참담한 결과를 반면교사로 삼아야겠습니다.

누구나 성공하면 겸손하기 힘들고,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채 하나님을 노래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뜻을 이루려고 이 길로 나섰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거지 나사로를 부끄러워하며 부자에게만 주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걸 놓치면 안 됩니다. 겉보기엔 멀쩡한 데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서야 되겠습니까? 한글과 세종대왕만 자랑하며 기뻐하다가 고유어를 잊어버린 채 얼빠진 민족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내 영광에 목말라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놓쳐서야 되겠습니까?

부름 받은 교회와 성도는 이미 존재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능력가치 추구에 골몰하다가 존재가치의 영광을 잃지 않는 게 우리의 지혜인 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