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추락과 욕망의 함수 관계_최에스더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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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추락과 욕망의 함수 관계

 

< 최에스더 사모 · 남서울평촌교회 >

 

“막장 드라마 주인공들 천국에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

 

 

에덴 이후로 역사는 언제나 동일한 주제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늘어서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고만고만한 줄거리로 죄인들의 갖가지 행보를 보여주며 한 마디로 ‘별 것 없는 인생,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게 주제인 것 같은데, 지나간 드라마를 주의 깊게 보면서 깊은 교훈을 얻다가도 그 드라마가 정작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시점만 오면 다들 이 주제를 잊어버리고 심각한 착각과 역겨운 도취에 빠지는 것 같다.

 

사람들이 쳐주는 박수와 환호와 부러움이라는 달콤한 환상에 빠져서 그걸 손 안에 쥐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자기가 한 때 품었던 꿈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악취가 나도록 변질되고 썩어져버린 것도 모른 채 역사의 드라마에서 백사장의 모래 한 알처럼 존재감 없이 사라진다.

 

지금 한국교회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련의 사람들과 그들의 꿈도 역사 속에, 말세지말(末世之末)에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었나보다. 아이들과 함께 시편을 묵상하는 요즘, 다윗의 시 가운데 마치 지금 한국교회를 보고 쓴 것 같은 말씀을 며칠 전에 읽고 깜짝 놀랐다. 시편 17편 14절 말씀이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자니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배를 불리고 자녀들도 만족하게 하고 남은 것을 그들의 아이들을 위해 놓아두는 사람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몫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 저 세상, 즉 구원받은 자들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을 영원한 천국에서는 받을 몫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은 이 말씀을 가만히 읽고 있으려니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그 시절의 다윗이 어떤 식으로든 다 지켜보고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직을 놓고 벌이는 각양각색의 막장 드라마를 여러 편 보면서 입맛이 떫고 쓰고 속은 더부룩하고 메스꺼워서 ‘토하여 버리리라’가 이런 기분인걸까, 가릴 수만 있다면 완벽하게 가리고 이 드라마들이 다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세상의 눈을 돌려놓고 싶었다.

 

바닷가의 모래 알갱이 정도의 존재감 밖에 없을 이런 인생들을 보지 말고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라고, 그들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고, 그들을 봐달라고,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지만 묵묵히 주님의 길을 따라 걸으며 외롭고 고단한 삶이지만 성결과 경건으로 옷 입고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옵고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는(시 17:15)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 누구인가. 이 길고도 긴 인생들의 드라마가 끝나고 하나님이 명장면, 명대사를 고르실 때 거기에 뽑혀 나갈 진정한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주말의 명화’ 시그널 음악이 깔리고 당대의 주인공들의 얼굴이 천국 시민 앞에서 클로즈업 될 때 지금의 막장 드라마 주인공 목사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건 아닐지 정말 두렵다.

 

그들도 처음부터 막장 드라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들이 추락하기 시작한 시점이 혹시 나의 지금인 건 아닐까. 내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이 거룩한 욕심이 무엇을 만나고 어떤 일을 겪으면서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남고 싶다는 악착같은 욕망이 되는 걸까.

 

아! 이 가시 같은 질문을 감사히 끌어안자. 날마다 이 질문을 벼리고 갈아서 꽉 끌어안고 살자. 내 양심을 호벼 파고 내 진심이 난도질당하여 내가 새로워질 수 있다면, 주님 앞에 가 설 수 있다면 기꺼이, 감사히 이 가시를 안고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