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에_ 윤순열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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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에

 

< 윤순열 사모, 서문교회 >

 

 

“하나님이 주신 자연, 내것이라 생각하면 마음도 넉넉해져”

 

나는 유난히 가을이 좋습니다.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고 있는 저에게는 봄부터 가꾸어온 고추며 고구마, 호박, 땅콩 등 수확할 것들을 거두어들일 생각을 하면 몹시 기분이 좋습니다.

 

며칠 전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새까만 산모기에 물려가면서 남편과 함께 서둘러 고구마를 캤습니다. 찬바람에 올망졸망 맺은 풋 호박도 땄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밭으로 향하는 길옆에 핀 이름 모를 하얀 들꽃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들꽃을 보는 순간 ‘아!’ 하는 감탄사가 저도 모르게 나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가지를 뻗어 내려와서 일부는 발에 밟히기도 하면서도 순백의 작은 꽃들을 화사하게 피어 길가는 나그네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웃을 일도 기쁠 일도 별로 없는 세상에서 이 들꽃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잠시나마 마음에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이름 모를 들꽃 하나도 봄부터 가을까지 수많은 비바람을 견뎌오면서 어여쁜 꽃을 피워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듯 하여 저의 마음이 뭉클합니다.

 

또한 아파트 산책로 옆에 펼쳐진 논에 누렇게 익은 벼들이 저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달빛을 머금은 듯 온통 노랗게 익어버린 벼들은 하나같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주인의 추수를 기다립니다. 노오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듯 한가위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듯 노오란 벼들의 향연은 저의 마음을 황홀하게 합니다. 또한 이 누런 벼들을 보면 왠지 마음이 넉넉하고 풍요로워 집니다.

 

누런 벼들을 보니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해 동안 지은 곡식을 추수하던 형제는 서로를 생각합니다. 형님은 동생의 어려운 형편을 동생은 형님의 부족한 살림을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형제는 아무도 모르는 밤에 자기의 볏단을 몰래 갖다 놓고 옵니다. 그러다가 형제는 달 밝은 밤에 볏단을 지고 가다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둘은 얼싸안고 울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서 얼마나 훈훈한 이야기인지 가을 들녘에 누렇게 익은 벼들을 보면 이 장면이 떠오르곤 합니다.

 

가을이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처마 밑이나 담장 밑에 피어 있는 국화꽃입니다. 찬 서리를 머금고 담장밑에 처연하게 피어있는 국화꽃들을 바라보노라면 왠지 모를 외로움이 밀려오는 듯합니다. 아마도 모든 꽃들이 찬 서리에 시들어 버린 벌판에 홀로 고고하게 찬 서리를 머금고 피어있는 모습이 외로워 보여서 그런 듯합니다.

 

국화꽃의 진한 향기는 신록의 마지막 계절이라서 그런지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 진한 향기는 아마도 봄, 여름, 가을을 지나오는 동안 인고의 세월로 만들어진 향이어서 향 중의 향인 것 같습니다.

 

베란다 창문에서 바라다보는 붉은 단풍 몇 그루도 일품입니다. 아파트를 지으면서 조경을 하느라 어느 깊은 산속에서 옮겨왔는지 날씨가 약간 쌀쌀해 지면서 붉은 자태를 뽐내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이 단풍은 이곳에 오기 전 깊은 산중에서 신선한 바람과 더불어 계곡의 맑은 물소리 산새들의 지저귐 맑은 하늘 하얀 안개 비바람 등과 살다가 시끄러운 도심으로 옮겨왔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나무들은 자기들이 본래 가진 어여쁜 붉은색으로 삭막한 아파트를 훈훈하게 합니다.

 

얼마 전에는 남편과 함께 상쾌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저녁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우리는 늘상 걷는 산책로를 한 바퀴 돈후 다 끝나고 가버려서 한적한 골프장 입구 산책로에 들어섰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잘 단장된 골프장 길에는 최고급 벤츠들이 쉴새 없이 들락거리고 경비들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경비들도 퇴근했는지 아무도 없고 저녁 늦은 시간이라 한적하고 너무나 조용합니다. 잘 단장된 조경나무들 그리고 카펫같이 깔아놓은 잔디위로 저녁 안개가 피어오르니 황홀합니다. 이 아름다운 골프장 전경을 보며 남편과 저는 말했습니다.

 

“이곳이 다 우리 정원이야! 저들은 다 우리의 일꾼들이지. 날마다 잔디를 깎고 예쁘게 가꾸느라 수고하는 것을 우리가 누리고 있잖아.” 그렇습니다. 다 생각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보면서 다 하나님의 것이니 그것이 또한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골프장 안으로 좀 더 들어가자 그림같이 예쁜 하얀 집이 있습니다. 골프를 치다가 쉬는 집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 은퇴하면 저런 집 짓고 방3개 만들어서 아들과 딸이 오면 아들하나 딸 하나 주어서 쉬어가게 하자고 미래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낮에 우울했던 마음도 현실의 고통도 미래의 아름다운 꿈을 속삭이면서 다 날아가 버리는 듯 마음이 즐겁습니다.

 

우리는 캄캄한 가로등 빛으로 환하게 보이는 가을 산책길을 걸으며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남다른 기쁨을 맘껏 누리며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