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젖은 송이버섯_ 김영숙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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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젖은 송이버섯

 

< 김영숙 사모, 일산새하늘교회 >

 

 

“한참 자고 나서 깨어보니 아직도 깊은 산속이어서

이제는 죽는구나 싶었지요. 얼마가 지나자 불빛이 보이더니

미국 경찰들이 큰 개를 데리고 나타나더군요.”

 

“하마터면 내가 목사님, 사모님을 다시는 못 볼 뻔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아요.”

미국 덴버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함께 교회를 섬겼던 신 권사님이 며칠 전 한국을 방문하셔서 만나 뵈었는데 만나자마자 그 말씀을 하시더니 우리를 끌어안고 한참을 가만히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78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씩씩한 권사님이었는데 그 날은 기운이 없어 보였습니다.

 

“권사님, 그동안 많이 편찮으셨나요?”

“아니요. 문제는 송이 때문이었어요.”

 

해마다 9월이면 록키산 자락으로 죽은 소나무 밑에서 자라는 자연산 송이버섯을 캐러 다니던 성도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인적도 없어 염려가 되어 만류할 때마다 그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자연산 송이가 우리를 부르니 안 갈 수 없어요. 9월 중순이 되면 자다가도 송이가 눈에 어린다니까요.” 권사님은 한숨을 한 번 더 쉬시더니 다음과 같이 자초지총 설명하셨습니다.

 

두 주전에 와이오밍 산으로 버섯을 캐러 갔는데 가다보니 여기저기에 송이가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계속 송이를 따라가며 많이 캤지요. 한참 가다가 주위를 살펴보니 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갑자기 겁이 덜컥 나서 딸과 일행들의 이름을 부르며 산속을 헤매다 보니 밤이 되고 말았지요. 배도 고프고 걸을 힘도 없어 캐 놓은 버섯을 먹고 나니 피곤이 몰려와서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한참 자고 나서 깨어보니 아직도 깊은 산속이어서 이제는 죽는구나 싶었지요.

 

사나운 짐승들이 밤에 어슬렁거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짐승들이 오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데려가시라고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계속 찬송을 부르고 있었어요. 얼마가 지나자 불빛이 보이더니 미국 경찰들이 큰 개를 데리고 나타나더군요.

 

나에게 한국말로 “엄마? 엄마!”라고 하기에 나도 “엄마! 엄마!”라고 했더니 나를 헬리콥터 있는 곳으로 데려갔어요. 헬리콥터를 타고 내렸더니 그곳에 내 딸이 초죽음이 되어 일행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지요. 내 딸이 미국 경찰들에게 내가 영어를 못하니 그냥 “엄마, 엄마”라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나를 찾기 위해 수십 명의 미국 경찰들과 경찰 개들이 동원되었대요. 나를 찾은 시간이 밤 11시쯤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목사님, 사모님! 내가 그래서 이렇게 살아 한국에 다니러 왔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자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권사님, 내년부터는 절대로 송이버섯 캐러 가지 마세요.”

“…………”

 

권사님이 대답을 안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권사님이 잡수시려고 그 송이를 캐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사는 자녀들에게 보내려고 그러는 것을 알기에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권사님과 함께 섬기던 교회를 떠난 지 7년이 넘었는데도 해마다 고사리 철이 되면 고사리를, 송이버섯 철이면 송이버섯을 말려 보내시던 권사님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내 것까지 챙겨 오셨습니다.

 

“권사님, 그동안 저에게 주신 사랑만으로도 충분해요. 목사님과 제가 미국을 떠나 한국까지 왔는데 이제 잊을 만도 하시잖아요. 그 교회를 떠난 지 벌써 7년이나 지났는데……..”

“사모님은 멀리 떠났다고 자식이 잊어지나요? 사모님을 내 큰딸처럼 생각하고 살았어요. 60살이 되도록 한글을 못 깨우쳐서 사람답게 살지 못했는데 사모님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었잖아요. 그 은혜를 어떻게 내가 잊을 수 있습니까?”

“권사님! 그 일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세요. 그동안 제가 받은 사랑이 얼마인데요.”

 

처음 부임해서 교회에 갔더니 성경을 거꾸로 들고 있던 어른이 계셨습니다. 내가 한글을 가르쳐드리겠다고 했더니 그분은 이제 늦었다고 만류하시던 것을 설득해서 4개월만에 한글을 깨우치시고 열심히 신앙생활하시다가 권사님까지 되셨습니다. 미국 덴버에서 목회하던 11년 동안 그분은 우리 부부에게 늘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권사님, 한국에 오니 자연산 송이버섯보다 더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니 제발 내년에는 그렇게 험한 산에 가지 마세요. 다른 자녀들도 같은 생각일거예요. 제발!”

 

그 말을 하다 말고 나는 결국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사모님! 이 늙은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요. 그러니 나 하고 싶은 것 하게 놔두세요. 내년에는 딸의 팔에 끈을 묶어 갈 테니 걱정 마세요.”

“권사님! 이제 더 이상 목이 메어서 그 송이버섯은 못 먹을 것 같아요. 제발 이제는 보내지 마세요.”

 

그러나 그 말은 권사님의 우렁찬 음성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이 자연산 송이버섯이 좋긴 좋은가 봐요. 그것 먹고 몸이 좋아진 사람이 많대요. 목사님, 사모님! 이것 먹고 아프지 말고 튼튼해져서 목회 잘해야 됩니다. 그것이 이 늙은이 소원이니까요.”

권사님의 그 활기찬 목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내 여린 가슴속을 떠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