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_ 이영란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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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슬로 쓴 편지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영란 사모_좋은소식교회

“좋은 부모를 주신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뿐” 

“남편이 교회에 온대요!” 성경공부를 마칠 때쯤 그녀의 남편에게서 전화
가 왔다. 올해 세례를 받고 놀랍게 변화되고 있는 이 동네 아이 엄마다. 

이혼까지 불사한다던 으름장 수그러들어

단단히 벼르고 온 그 남편은 아내가 종교를 즐기도록 허락한 것인데 성경공
부니 뭐니 하면서 빠지게 되면 이혼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나님
은 창조자이시고 지정의를 가지신 가장 완전한 분이신데 아내가 다른 데 빠
지는 것은 괜찮고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건전한 가정과 인생을 사랑
으로 가꾸는 것이 싫으냐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치매걸리신 아버지를 14년간 신앙으로 섬긴 친정 어머니 이야
기를 했다.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수그러들며 “내 아내도 그럴라나?” 하
면서 슬그머니 돌아갔다. 그 이후로 자녀들에게 “사랑
이 가장 중요한거야”
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며칠 후에 나는 그 집에 초대받아 그 남편
이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천사의 사랑을 매일같이 주셨다. 14년간 하루 하
루 병들어가는 남편을 아이처럼 품어 돌보게 하시다가 한점의 회한도 없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고 2년 여 전에 아름답게 헤어지게 하셨다. 지옥일 수
도 있었던 세월에 오히려 천국을 누리게 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어머니셨다.
심장수술 후 진행되던 망각의 삶은 인생이 죽어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
다. 70대에서 50대, 30대 그리고 결국 3, 4세 지능으로 떨어지고 종국에는 
아기가 되어 다시 엄마의 태 속에 들어가듯 무덤에 들어가셨다. 그렇게 사랑
하고 집착하던 큰 딸인 내 이름도, 아내도, 자식들도, 교회도, 돈도 잊어버
리셨다. 한 때 난폭해지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내 순수하고 착하게 변
화되어 가셨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날이 언제냐고 손을 꼽아 주일을 기다리며 
예배를 사모하고 진실하게 기도하셨다. 누구인지도 모를텐데 목사님만 
보면 
제일 반가와하셨다고 한다. 무심했던 아내에게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 
밖에 없다고 무수히 고백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 아내에게 가까이 가시고 
우리들에게 다가 오시던 아버지셨다.
“그래, 정말 힘든 것은 없니? 정말 행복한 거지?”라고 물으셨다. 한번은 
“하나님도 너무하시지! 네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하면서 한번
도 들을 수 없었던 속내를 드러내셨다. 그때서야 아버지께서 아들을 원하셨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아팠다. 
한번은 아버지 뵙고 돌아가려는데 집 밖까지 따라나와 4만원을 손에 쥐어주
셨다. 그것이 큰 딸을 기억한 마지막 사랑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의 사랑 안에서 잊어가는 만큼 순수해지고 자유롭고 그래서 더 사랑받으
셨다. 참 많이 웃으셨다. 우리들을 웃게 하셨다.
삶을 살아내려고 가끔 숨이 턱까지 막힐 때는 아버지 생각이 난다.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아버지에게 좀 더 따뜻한 사랑과 격려가 필요했다는 것을 중
년의 고비를 넘어서야 깨달았다. 아버지는 참 강인하고 능력이 많으셨다. 
딸 넷을 아버지 소원대로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게 하였고, 가정과 일가친척
r
들을 잘 세우기까지 많은 장애들을 이겨내셨다. 교회 건축에도 힘을 다하셨
다. 
서른 여덟살 된 막내 딸이 시집가는지도 몰랐던 아버지였다. 결혼식장에 모
시고 갈 수 없었지만 아버지에게 “아버지, 오늘은 아버지가 걱정하셨을 막
내 딸이 결혼해요!”라고 말을 하며 나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른
다. 자신의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얼마후 존귀한 성도의 모습으로 
천국에 가셨다.
화내시던 기억이 없을 만큼 자애로운 기도의 어머니! 그 어머니에게 나는 
“젊은 날 너무나 꼼꼼한 아버지 때문에 갈등도 많았지만 신앙으로 다 이겨
내시고 나이들어 병든 남편을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며 손주키우듯 사랑하셨
어요!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신앙이 얼마나 위대
한 것인지 말이 필요없는 삶이었다. 치매 교육을 위해 정든 대치동 집을 떠
나 이사까지 하셨다. 
아버지를 돌보는 것은 엄마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막내동생은 결혼 
적령기가 훨씬 넘어가기까지 엄마와 함께 했다. 자유로운 직장 일을 하며 아
버지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치고 친구가 되었다. 때로는 지치실까봐 몇번인
가 어머니를 
국내로, 해외로 여행을 보내드렸다. 그 기간동안 아버지 식사
며 대소변을 책임지며 아버지와 함께 했다.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새록새록 솟아납니다. 아버지로
서 누구에게도 말못할 짐을 지고 묵묵히 견디시다 병이 드셨다는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아버지. 큰 딸이 참 이기적이고 나밖에 몰랐던 것 같아요.” 아
버지께서는 내가 검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기대하셨는데 원치않는 미대를 고
집부려 갔고 또 소명의 길을 걷고 그렇게 결혼했다. 물론 후에는 인정하셨지
만 항상 목회자의 아내의 길이 힘들까봐 걱정을 하셔야 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아버지 희생으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눈물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셨다는 것
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임종을 앞두고 남편의 인도로 예배드린 후 나는 모든 가족 앞에서 울며 고백
했다. “아버지, 아버지, 너무도 감사해요, 그토록 딸 넷을 사랑하시고 최고
의 교육을 시키려고 애쓰시고 어려운 친척들과 교회를 위해서 그 모든 책임
다 하시느라 이렇게 죽어가는 삶을 살아주셨네요. 우리 모두는 아버지 때문
에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가장 훌륭한 분이셨어요. 사랑
해요, 아버지, 이제 편안히 가세요” 

아버지의 병수발하신 어머니께 감사해

놀랍게도 나를 쳐다보는 그분의 그윽한 눈가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