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_김영자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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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포에서 온 편지

하나님의 은혜 

김영자 사모_채석포교회

눈이 내리는 봄날이지만 계절의 시작에는 늘 설레임이 있습니다. 그 설레임 
속에는 빈 우체통에 자리하고 있는 사각 봉투에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고 알
리는 소식과 이 계절을 맛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소식이 전해
오기도 합니다. 

봄은 애경사 소식과 함께 시작되기도

농어촌에서는 이웃의 애경사가 나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내려
오는 품앗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성도들의 집이 아
닌 이웃들의 애경사의 집에 방문하여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곳 주민들의 평균 수명이 그 어느 곳보다 높다고 보고 된 바도 있듯이 성
도들의 절반 이상이 70세가 넘습니다. 남편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여러분
의 수명은 120세 입니다”라고 강조하는 외침에 싫지 않은 얼굴로 웃음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현대는 인간에게 돈을 더 하면 인격체가 되고 돈을 빼면 산송장이 된다고 했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서러운 삶을 살았던 한 인간에게도 하
나님은 사랑하고 계심을 어느 성도의 죽음을 통해서 산 교훈으로 보여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나이 들어 아프지 않는 곳이 없고 잘 듣지 못하며 구부러진 허리로 교회 언
덕을 올라오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꿈을 실어 주기 위해 말씀을 선포
하면서 서투른 섹소폰 연주로 희망을 실어 줄 때도 있습니다. 
추운 겨울나기를 지난 요즈음에 동네에 많은 장례가 있어 식장에 다녀오며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여자 집사님이 생각났습니다. 부끄러움과 무겁게 드리
운 삶의 그늘로 상대방의 얼굴조차도 마주 쳐다보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이 죄가 되지는 않지만 항상 죄스러움을 느끼며 성도들과 교제
도 별로 없고 며느리와 같이 가끔씩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아들 부부가 이
른 새벽에 바다에 나가면 남편과 같이 양지 바른 곳에서 하루 종일 찢어지
고 엉킨 그물 손질을 하여 다음 날 어로 작업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이따금씩 몸이 아프다고 지팡이를 짚고 병원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작은 
체구에 듣지도 잘 못하시고 말씀이 없으시며 묻는 말에 그냥 소
리 없이 웃기
만 했습니다. 어느 날 걸음을 걸을 수 없어 한방 병원에 입원해서 문병을 다
녀오기도 했습니다. 그 때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부끄러운 듯 웃기만 했습니
다. 
물리 치료를 받고 조금 낫는가 싶었는데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온다고 했습니
다. 처음에는 방광염이라 진단이 내려졌었는데 조금 지나 신장 암이라고 판
명이 났습니다. 치료를 받으실 때 문병 간 남편은 “집사님 하나님을 믿지
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시지요?” 하고 물으니 부끄러운 얼굴로 웃으며 
조용히 “네”고 대답했습니다. 
오랜 병상으로 작은 몸집이 더 작아지고 수술을 하기 위해 깍은 머리가 듬성
듬성 자란 모습이었지만 70평생 가난과 무지 속에서 죄인처럼 살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모습은 참 편안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돌아 가셨습니다. 오랜 관습으로 상조회가 동네의 장례를 주관하고 
있는데 며느리가 입관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준비가 되었다고 입관
실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염하는 자리였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서늘한 스테인레스 상 위에 흰 보자기에 시체가 뉘어 있었습니다. 장의사가 
시체를 알콜을 묻힌 솜으
로 닦아내고 수의를 입혔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초조하고 어색하여서 우리 모두 당황스럽고 난처하
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장례에 경험이 
없는 며느리는 가족만이 참석할 자리에 성도들을 참석시키고 말았습니다. 함
께 간 성도들은 모두 참석하여 염하는 모습과 입관 절차 모든 순서를 참관하
게 되었습니다. 누구하나 자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남편의 불안한 시선은 자꾸 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겁이 많고 병원
을 싫어하며 주검을 한번도 당면해 보지 못한 아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습
니다. 마침내 입관 절차가 끝나고 입관예배를 드리고 모든 절차를 마쳤습니
다. 
초등학교 때 시골에서 전학을 와서 살던 곳이 대학병원 앞이었습니다. 대학
병원 운동장이 우리들의 놀이터였습니다. 학업을 마치고 동무들과 크로바 꽃
으로 시계와 반지도 만들고 꽃을 엮어 화관을 머리에 쓰고 주의 발자취를 소
리소리 질러 부르며 마음껏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급학교의 언니가 우리가 놀고 있는 옆 큰 교실에 시체가 
있으며 언덕 위의 간호학교에 보이는 큰 굴뚝의 연기
는 사람을 태우는 곳이
라 했습니다. 겁이 많고 무서움이 많던 어린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난 후부
터 가장 무서운 곳이 병원이었습니다. 철이 들어 알고 보니 해부실과 소각장
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병원가기를 싫어하는 나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
고 놀림당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내가 끝까지 주검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의
아해하는 쪽은 남편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생각났었습니다. 살아생전 사람들의 시선 
한번 받지 못하고 교회 뒷자리에 앉아 며느리의 그늘에 있었던 집사님이 하
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고인의 마지막 가
는 자리까지 목사와 성도들을 보내어서 그 사랑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화장
장에서의 마지막 유골함이 채워지는 그 자리에도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의 장례를 보면서 내 가슴 속에 오래도록 파문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
습니다. 목사와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고인의 가는 길을 끝까지 참관하
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n무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듯하지만 상한 
심령으로 간구했을 고인을 불쌍히 여기심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가난과 질
고 속에서 한 평생 살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은 자로 우리
들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듬뿍 받은 것 분명해

신비로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아굴의 잠언을 묵상해 봅니
다.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
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