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생각하며
테레사 수녀에게 필요한 것
손성은 목사_런던양무리교회
8월 24일자 타임지에 소위 성녀라고까지 추앙되는 테레사 수녀의 사진이 실
렸다. 이상한 광기와 허무가 담긴 듯한 그녀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50여
년 동안 하나님이나 예수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살았다는 고백의
편지들을 모아둔 책자가 발간된 것 때문에 일어나는 센세이션을 다룬 특집이
었다.
평생 하나님의 임재 못 느낀 테레사
흔하디 흔한 일들 중 하나일 터인데 뭘 그리도 센세이션이라고 하는지 모르
겠다. 그녀에게서 무엇을 기대했었기에 이리들 야단일까? 그것은 모든 사람
들 속에 숨어 있는 테레사의 모습일 뿐이다. 너무 일찍 출세해 버린 그녀,
그 출세가 괴로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의 ‘신의 부재에 대한 용기’를 추앙치 말아야 한다. 이미 너
무 출세해 버린 수많은 ‘테레사’들이 아직도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바로 보아야 한다. 가장 거룩하
고 가장 인기 있다는 목사
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바로 이런 테레사의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들 내면 속에도 이런 모습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단지 테레사는 단지 용기가 있었을 뿐이다. 아니 자신의 편지를 다 태워버리
라고 하였다고 하니 그런 용기도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편지들을 남겨두
었던 사람들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허무를 대변해주는 그녀의 용기
가 부러웠던 것일까? 인간은 그 자체가 위선덩어리들이다. 그러니 속죄의 제
사들이 필요한 것 아니었을까?
레위기에는 ‘부정한 시체들과의 접촉’의 경우에 대해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라고 말씀한다(레 5:1-6). “누구든지 부정한 들짐승
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들 무릇 부정한 것을 만
졌으면 부지중에라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레
5:2).
‘시체’는 ‘주검’이다. ‘죽음’에 의한 것이다. ‘죽음’은 어떻게 시작
되었는가? 바로 ‘죄’로 인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함’이란 바로 죄와 죽
음의 상관 관계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삶의 허무가 죄와 밀접한 관련을 갖
는 것처럼 죽음(주검)과 죄 또한 뗄 레
야 뗄 수 없다. 바로 이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왜 곤충의 시체가
부정한 것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시체에 접촉한 것조차도 부정한 것
이 되는 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라도’ 곤충의 시체를 만지는 자들은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속
죄제로 드려야 한다. 아이구 맙소사! 곤충의 시체 한 마리 만졌을 뿐인데,
그 ‘죄’로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죽여야 했다.
‘죄’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을 모르면서, 하나님의 ‘거룩’을 알 수 있
을까? 혹은 느낄 수 있을까? 주님의 ‘거룩’을 모르고 ‘임재’를 느낄 수
있을까? ‘거룩’을 모른 채로 알고 있다는 주님의 ‘사랑’이란 또 무엇인
가? 그것은 허망한 사랑이고 거짓된 사랑이다. ‘죄’를 알아야 ‘사랑’
도 아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지 않았을까?
테레사의 소원은 그리스도가 지금까지 어떤 인간에게도 받아보지 못했던 그
런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보
다도 더 신을 사랑하기를 원했던 그녀는 하나님보다 더 거룩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상상의 거룩 속에서 산다는 것은, 그럴 수 있었던 그녀가 영
적 천재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인간됨을 넘어서는 교만인줄을 그녀는 몰랐
을 것이다.
누구보다 신을 사랑하려 했던 그녀
신에게 안기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을 안으려고 하였던 그녀가 아닐까?
아, 테레사여, 그대가 너무나 추한 인생인 것을 어쩜 그만 잊어버린 것 아니
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그대의 추악한 죄악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아마도 그
대는 그대를 안아주는 신을 만났으리라. 하지만 그대에게는 신이 없었다. 그
리스도가 없었다. 그대에게 안길 신이 어디 있더란 말인가? 그대의 품이 더
러워 그대에게 안길 그리스도가 어디 있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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