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지 않은 잣대 때문에
민경희 사모/평안교회
12월. 기억으로는 군고구마를 먹던 계절이지만 이젠 동네 어디에서도 군고구
마 파는 아저씨를 보기는 어렵다. 드럼통을 옆으로 눕혀 연통을 달고 여기저
기 서랍들을 열어 잘 익은 고구마를 꺼내는 걸 보고 신기해하던 그렇게 굉장
한 발명품 같은 군고구마 리어카가 사라졌는데 연탄불에 구운밤이랑 꼬치에
꿰어 파랗게 익은 은행을 호호 불며 뜨거워서 입안에 굴려 먹는 정감어린 겨
울 풍경이야 못 본지 오래다.
오랜만에 나들이처럼 별러서 명동에 나갔다. 강남 한복판에서 20년을 사는 사
람이 요즘도 명동엘 가느냐고, ‘무어 볼 것이 있다고’ 가본지 십 년은 넘은
것 같다는 친구도 있고, ‘사모님은 아직도 젊은이들처럼 산다’ 고 보기 좋다
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무슨 시를 노래하며 명동거리를 걷는 것도 아니
고 대학시절 만난 남편이랑 추억이 쌓인 곳이라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냥 고
지식해서, 게다가 남편은 나보다 더한 사람
이라 두 사람이 중학교 들어가면
서 쓰게 된 안경 때문에 가는 건데 한 번 어쩌다 들어간 가게는 그 다음부터
는 무조건 단골이라서 안경 역시 단골 안경집이 없어지면 그 곳에서 일하던
분이 옮겨가는 곳이 단골이 되고, 그러다보니 40여년 명동에서 안경을 맞춘
다.
옷 가게, 화장품, 구두… 상점마다 음악소리가 울려서 거리 전체가 굉음으
로 가득하고 새로 지은 고층빌딩과 리모델링한 빌딩들이 많지만 그래도 거의
변한 것도 없어 보이는 아직도 낯익은 그 곳, 명동에는 연탄불에 구운 군밤
이랑 은행이랑 오징어가 가득한 리어카가 있던 것이다. 흘깃 쳐다보며 지나치
는 내 눈이 반짝했는지 아니면 어리숙하게 보였는지 “덤 많이 드릴게요. 좀
팔아주세요”한다. “좀 팔아주세요”하는 말이 나를 잡아당긴 것이 아니라 오랜
만에 들은 “덤”이라는 따듯한 말에 벌써 성큼성큼 몇 걸음 지나친 걸 돌아섰
는데 수건까지 가리고 모자를 푹 눌러쓴 젊은 아낙이다.
금방 구운 거라 따듯하다며 봉투에 담고는 컵을 쌓여있는 은행더미에 거꾸로
세웠다. “많이 파세요” 웃으며 받아든 봉투는 세 손가락으로 집어준 덤
두개
를 합해서 정말 한줌이다. 좌판 위에 은행이 탐스럽게 가득 담긴 컵들을 보
고 뒤돌아보며 컵을 얼른 거꾸로 뒤집어 세우던 것이 그러려니 하면서도 씁쓸
하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속이는 저울….,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 여호
와께서 미워하는 것… 먹고 살기 어려운 열심히 사는 아줌마를 탓하는 것은
아닌데….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 생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
고 지난 가을 만난 멋쟁이 내담자가 생각났다.
작은 원룸 같은 교회 때문에 그런지, 아니면 별로 권위 있게 보이지 않는 나
때문인지 입을 열지 않고 여기저기 둘러보고 한참을 숨을 고르고 얘기를 꺼냈
다.
“큰 애는 공부도 잘하는 아이가 얼마나 세련되게 멋을 내는지, 멋도 부릴 줄
알고,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나무랄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런데 둘
째는, 연년 생인데요 공부도 못하면서 어쩜 그렇게 모양을 내는지…” 고등학
교 2학년인 큰 딸 얘기를 할 때는 자랑스러워하며 고개를 반듯이 세우고 고
운 미소를 짓던 아름다운 분이 둘째 아이 얘기를 시작하면서는 숨소리도 고르
지 않고 고개를 모로 꼬고 헛웃음 소
리를 내며 마치 다른 사람 같은 얼굴이
됐다. “게다가 식탐은 또 얼마나 많은지 뭐든지 먹어요. 배고프면 돌이라도
씹을 아이지요”. ‘꼴에'(이건 들은 말이 아니라 순전히 내 생각이었지만) “나
~ 참… 그러면서 저더러 언니 편만 든다고 억지를 부려대니 큰애나 저나 살
수가 없어요”.
보여주는 사진 속에는 콧날이 오똑하고 쌍꺼풀진 눈이 서늘한 미인형의 쌍둥
이 같은 두 소녀가 웃고 있었다.
엄마가 가진 ‘성적’ 이라는 부질없는 잣대가 멋도 잘 부리고 아무거나 잘 먹
는 예쁜 두 딸을 그렇게 다르게 보게 한다는 것에 한참을 마음이 아팠던 일이
다.
‘공평하지 못한 간칭과 명칭’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 여호와께서 미워하
시는 것…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잔뜩 흐린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