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최절정을 위하여(2)
목회자의 진실성과 충성이 문제다
장창수 목사(러시아 선교사)
이미 묵상했듯이 흔히 우리들은 목회의 꽃을 목회의 정점으로 본다. 이 때문
에 목회의 정점은 대형 목회라고 생각하며 이를 목표로 열심히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이 양적 교회 성장론은 실용주의 철학과 영웅 철학이
지배하는 미국 사회가 미국 교회에 미친 영향의 결과이다. 물론 성경적인 목
회에도 실용적인 사고가 요하며 그리고 교회 성장은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
해 좌우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어느 날 예수님은 용서에 대해 제자들에게 설명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
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
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
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3-4). 제자들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이
에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런 믿음을 더 해 달
라고 요구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는 동문서답 식으로 이렇게 말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
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은 양적 문제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이들은 용서의 문
제가 믿음의 크기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
의 제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진실하
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용서가 가능하다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여기 믿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과 관계된다면 예수
님에 대한 믿음은 양적 문제가 아닌 인격에 바탕한 진실성의 문제이다. 바로
이 점을 우리들은 자주 잊는다. 그 결과 현대 교회에는 은사들에 기반한 영웅
주의가 판을 치며 누가 더 많이 전도했냐는 양적 실용주의가 팽배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듣는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
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
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
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
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
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7-
10).
양적 교회 성장론에 의하면 대형 목회자일수록 그 만큼 대접을 받는다. 이것
이 부러워 누구나 다 대형 목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말하는
목회와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목회를 양적 문제가 아닌 목회자의 진실성과 충
성의 문제로 보셨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가 주장하는 바이다(마 25:14-30).
그렇다면 목회의 최절정은 진실한 충성에 있다. 그러나 이 충성은 목회자에
게 자기 부정을 요구한다.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