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和解)와 상생(相生)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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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단상<28>

화해(和解)와 상생(相生)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반목을 멈추고 화해와 용서 통해 과거 정리해야”

우리 사회가 반목(反目)과 질시(嫉視), 그리고 분열 없이 건전하게 유지되
기 위해서 화해는 가장 기초적으로 필요한 덕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필요한 덕목은 ‘화해’

화해는 가해자가 화해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화해를 요청할 때 
설득력이 있고 감동이 있다. 가해자는 화해를 요청하기 전에 잘못을 시인(是
認)하고 용서를 구한 후에 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 일상의 삶이지만 어찌됐건 서로 등
을 돌린 사람들이 화해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지친 삶에 힘을 주는 것이 사실
이다. 얼마 전 김대중 전(前)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북쪽에서는 특별 조문 사
절단을 남쪽에 파견했고, 분향소 앞에는 김정일이 보낸 조화(弔花)가 놓였
다. 북쪽의 조문 사절단은 단지 조문만 한 것
이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이명
박 대통령을 예방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대화를 나누고 돌아갔다. 
그 동안 단절되었던 남북관계가 가뭄 끝에 내린 단비처럼 오랜만에 다시 만
나 대화의 첫 단추를 만지작거렸다는 사실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
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화해가 아니더라도 꽁꽁 얼어붙은 남북 관계에 대
화가 오고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은 사실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된 관계도, 이
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가로막힌 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
신 피로 말미암아 모두 허물어졌고, 화평이 이루어졌다. 
바울은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그(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
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
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기 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
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a)고 말한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그리스도의 피흘림이란 십자가 희생이 필요했
던 것처럼 
언제나 화해는 희생을 필수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
지만 화해를 위하여 누가 어떤 희생을 감수할 것인가?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가해자의 뉘우침과 잘못의 시
인이다. 실제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
가 필요하다. 피해자 역시 가해자를 용서하며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려고 할 
때 희생이 따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상생을 위하여 필요한 희생이
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암시를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일들
을 통해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북한이 정말 화해의 진정한 손
을 내미는 것인지가 관건이다. 하지만 모처럼 찾아온 해빙(解氷) 기회를 놓
치는 실수가 없기를 기대한다. 기회란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서로 등을 돌리며 상대방을 짓밟고 살아가기 보다는 함께 손잡고 살아가는 
상생의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또한 우리 사회 속에 뿌리 깊은 갈등과 반
목 질시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증진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아직도 한 가지 풀지 못한 우리 사회의 숙제인 용산참사 문제에 대하
여 정부
는 투명하고 솔직한 태도와 행동으로 상생을 이끌어내는 발상의 대전
환이 필요해 보인다. 시간이 지나 모든 사실들이 서서히 국민들의 머릿속에
서 지워지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치유가 필요한 상처를 싸매어 주며, 잘
못 꿰어진 단추는 다시 풀고 새롭게 채워주는 따듯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다. 
그 어떤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용서를 구하는 얼굴에 침을 뱉지
는 못할 것이다. 만일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침을 뱉는다면 우리 사회는 
미래가 없다. 왜냐하면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당시에 힘과 권력에 의하여 묻혀버린 것 같지만 시간
이 지나면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듯 다시 살아나 잘못된 일들이 다
시 정리되며 감추어진 진실은 백주(白晝)에 들어나게 되는 법이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일들을 통해서 이미 
경험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진실화해
위원회를 설립하여 자기 나라를 치유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반목과 질시
를 멈추고 화해와 용서를 통하여 과거를 정리하며 함께 살
아가는 상생의 삶
으로 한 걸음 전진하기를 기대한다. 자연도 인간의 편리한 삶만을 위하여 훼
손하며 파괴하지 말고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며 모든 것에 효율성의 
잣대만 들이대며 일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공존하는 사회가 되도
록 노력해야 한다. 
아무 철학이 없이 효율성, 수익성만 계산하여 인간을 기능화 시키는 죄악을 
저지르지 말고, 맘몬 앞에 굽실거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
는 정부의 정책이 되기를 바란다. 때때로 잘못된 정책을 시인할 줄 아는 정
부, 그리고 잘못된 것을 다시 수정하여 새롭게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
런 정부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가? 
이런 점에서 교회는 맘몬을 숭배하고 사람을 기능화하고 약자를 더 약하게, 
아니 처절하리만큼 나약하게 만드는 정책에 대해서 바로 알고 올바른 선지자
적 비판의 목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하며, 행동하는 양심을 위한 최후의 보루
(堡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의 보루 되어야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를 구하는 자와 진실된 마
음으로 화해하는 사회가 되어질 때 우리에게 
밝은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