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가고자 함이니 _조병수 교수

0
5

딤전 5:11-12

시집가고자 함이니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기독교는 금욕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세상살이를 완전히 끊
고 산이든 들이든 어느 폐쇄된 공간에 갇혀 수도사처럼 생활하는 것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살이에서 멀어질수록 훌륭한 
영적인 신자가 된다고 생각을 한다. 
사실 이런 생각은 역사적인 문제였다. 기독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피
세주의를 염원했던 개인과 단체가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리고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우리 주위에 적지 않은 사람들
이, 심지어 신앙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신자들까지도 기독교를 금욕 종교
로 받아들이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는 금욕종교 아니다

디모데전서만 잘 읽어보아도 이런 생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가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는 종교
가 아니라는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런 경향을 가지
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센 비판을 가하는 것을 마다 않았던 것을 볼 때 확실하
게 드러난다(딤전 4:3). 
특히 사도 바울은 정상적인 혼인생활이야 말로 기독교가 지향하는 올바른 세
상살이의 특징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도 바울이 감
독과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 더 나아가서 명부에 올
릴 과부는 한 남편의 아내이었어야 한다고 말할 때 이런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젊은 과부들은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하
기 때문에 명부에 올리는 것을 거절하라고 말했을 때(11절) 기독교를 금욕주
의에 편승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젊은 과부가 다시 혼인하
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금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
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나는 젊은(과부들이)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기를 바란다”(딤
전 5:14). 사도 바울이 젊은 과부들을 거절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들이 마

치 혼인문제에는 초연한 것처럼 행동하면서 주님께만 헌신하겠다고 장담하고
는 결국 시집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젊은 과부들이 혼인하는 
그 자체에 잘못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혼인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 후에 결국은 혼인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행동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11절)이며 “처
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12절)이라고 불렀다. 젊은 과부들이 처음부터 재혼
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주님께 헌
신하기 위하여 혼인도 고사하겠다고 결심한 후에 결국은 시집을 가는 것은 좋
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며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과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이유를 정욕 때
문이라고 간주하였다. 사실 여기에 사용된 정욕이라는 말이 꼭 성적인 욕구
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이 단어는 무엇인가에 과욕을 부리는 태도를 의
미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사치에 과욕을 부린다든가 하는 
경우이다(계 
18:7,9 참조). 
여기에서는 이 단어가 혼인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맥상 정
욕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혼인도 마
다하던 사람이 나중에는 성적인 욕구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너
무나도 허망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허망한 일이 어디 정욕과만 관계되는 일
이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모든 세상살이에도 관련되는 일이지 않은가? 

금욕 과잉 욕심으로 변질 돼

기독교가 금욕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세상살이를 신앙적으로 승화시키
는 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표현하
는 것이 될 수 있다면(고전 10:31) 주님을 위해서 혼인하지 않겠다고 할 것
이 아니라 처음부터 혼인을 주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