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딤전 2:7c)
기독교계 신문지상을 통해 지금은 꽤 이름 있는 목사인 것을 알게 되었지
만 두 번 다시 만나본 적이 없는 그 사람과의 첫 대면은 내가 대학입시를 준
비하고 있던 여름이었다. 겨우 한낮의 더위가 물러나 마음을 추슬러 책을 잡
았을 때 열린 창문을 넘어 어디선가 솔솔 들려오는 찬송소리에 이끌려 발이
닿은 곳은 동네 교회였다. 사십 세가 훨씬 안된 듯한 설교자는 말끝마다 자신
이 정통교회의 목사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까,
믿습니까”를 연속적으로 수없이 반복하였다. 물론 청중이 중년의 설교자의 말
이 끝나기도 전에 목이 터져라 아멘을 외쳐댔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
는 한 시간도 넘게 그 자리에 앉아서 귀를 기울였지만 소란스러운 설교와 아
멘 소리에 속만 울렁거릴 뿐 아무 진리도 얻지 못하였다. 그 날 나는 한 가
지 다짐한 것이 있다. 그것은 앞으로 다시는 이런 무의미한 집회에는 참석하
지 않으리라는 것
이었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
다. 주님께서 얼마나 자주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를 꾸중하셨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산을 명하여 옮길 수 있다고 주님
께서는 가르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구
했던 것이다. 주님의 생각은 사도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대표적으로 사
도 바울이 믿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째 편
지의 앞부분을 조금만 읽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디
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딤전 1:2)이라고 부르면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 (딤전 1:4) 대신 변론을 일으키는 잘못된 교훈을 피할 것을
권면하고 “거짓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 (딤전 1:5)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믿음은 절대로 홀로 서서는 안된다. 믿음은 반드시 진리와 함께 가
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된다. 진리 없는 믿음은 우
신 (愚信)이며 맹신이며 광신이다. 이것은 의심과 소신 (小信)과 불신만큼 위
험한 것이다.
그래서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고전 13:2) 사도 바울의 말은 진리가 없으면 아무것
도 아니라고 바꾸어 써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믿음을 바른 믿음으로 잡아주
는 것은 진리이다. 진리는 믿음의 지팡이이며 신앙의 길잡이이다. 그래서 사
도 바울은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딤전 2:7c)
고 말했던 것이다. 틀림없이 자신들의 종교에 심취해있던 이방인들에게 믿음
을 충동하는 것은 쉽지만 진리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
도 바울은 쉽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믿음만을 충동하지 않고 어렵기는 하지만
지성적으로 진리를 설명했다. 믿음과 진리는 항상 같이 가야한다는 것을 알았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를 써내려
갈수록 진리에 관하여 중요한 언급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은 모
든 사람이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 (딤전 2:4), 교회는 진리
의 기둥과 터라는 것 (딤전 3:15), 성도는 믿음과 진리에 균형 잡힌 사람들이
라는 것이다 (딤전 4:3).
오늘날 적지 않은 경
우에 우리에게는 믿음만 있고 진리가 없다. 입버릇처
럼 목사는 설교 중에 “믿습니까”를 연발하고 성도는 기도 중에 “믿습니다”를
반복하지만 진리는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히 우리는 설교에서든
지 기도에서든지 기독교적인 것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주절거리며 뇌까리고 있
는데 그 가운데 진리는 없다. 어쭙잖은 시사실력을 뽐내며 길거리 약장수처
럼 이야기를 늘어놓는 목사 그리고 우스개 소리에 만족하고 희학을 즐기는 성
도가 즐비한 것이 우리의 현실 기독교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위험한 발언
인 줄 알지만 (!)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정통교회라는 곳에는 진리추구
가 없고 이단집회라는 곳에는 (물론 잘못된 것이지만) 진리추구가 있다. 우리
는 지금 균형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