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방정식 (딤전 1:19b)
만사에 법칙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에도 법칙이 있고, 물질적인 세계에서처럼 영적인 세계에도 법칙이 있으며,
세속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것에도 법칙이 있다. 법칙이 깨지면 만사
가 깨진다. 신자의 삶에도 엄격한 법칙이 있다. 신자는 기분 내키는 대로 아
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분명한 법칙을 따라서 산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믿음과 양심을 가져
야 한다고 말했을 때 믿음과 양심은 선한 싸움을 위한 법칙이 된다는 것을 알
려준 것이다. 믿음은 수직적인 성격을 가진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양심은 수평적인 성격을 가진다. 양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직적인 성격의 믿음과 수평적
인 성격의 양심이 잘 어우러질 때 그리스도인은 선한 싸움을 싸울 수가 있
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좋은데 사람에 대한 양심이 좋지 않다거나, 사람
에 대한 양심은 좋은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좋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선
한 싸움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믿음과 양심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싸움을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들이다. 마
치 수직선과 수평선이 십자로 만나면서 한 점을 결정하듯이, 믿음과 양심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선한 인생이 결정된다. 믿음과 양심은 그리
스도인의 인생 방정식의 두 차원이다. 그래서 믿음과 양심 가운데 어느 하나
라도 제외시키면 그리스도인의 선한 인생은 성립될 수가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수직없는 수평이 되거나 수평없는 수직이 되고
만다. 양심을 무시하고 신앙만을 강조하는 것은 과도한 경건이며, 신앙을 무
시하고 양심만을 강조하는 것은 부족한 경건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너무나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람에 대한 양심을 무시하거나, 사
람에 대한 양심을 유별나게 강조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시들어버린 사
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신자의 법칙을 기형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과도한 경건도 문제이며 부
족한 경건도 문제가 되지만 이보다 더 심
각한 것은 파괴된 경건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양심이 조화된
신자의 삶을 권면하는 시간에 경건을 파괴해버리는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발
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요소인 믿음과 양심을 한꺼번에 망가뜨렸던 것이다.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19b).
한편으로 그들은 양심을 버렸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끄러운 일을 해
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해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들
은 그런 일에 대하여 무감각하였을 뿐 아니라 아예 그런 일을 정당하고 당연
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사전에는 부끄러움이나 수치스러움이
란 단어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우습고 가벼운 것으로 생각할 정도가 아니라 하나
님을 믿는 일을 거부하기 위하여 온 몸을 부딪혀 깨어졌던 것이다. 이런 사람
들에게는 신앙
인의 법칙이란 것이 아무런 중요성이 없었다. 우리의 시대에도
어떤 사람들이 언젠가 잠시 기독교 신앙에 접근했다가 도리어 양심과 믿음에
서 파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양심을 버리는 언어를 말하는
것과 믿음에서 파선한 행위를 행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조금 맛보았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정당한 반작용인 것처럼 생각한다.
믿음과 양심은 신자의 삶을 위한 엄격한 법칙이다. 믿음과 양심의 교차는
신자의 방정식이다. 믿음과 양심의 조화로 결정되는 삶이 우리를 안전하게 항
구로 인도한다. 우리는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하려면 신앙의 수직 차원과 양심
의 수평 차원을 행로의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폭
풍우가 치는 바다에서 소용돌이에 빨려들어 파선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기억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