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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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2)
지난 호에 이어 간단히 틸리히의 신학을 논하도록 하겠다. 지난 호에서 우리
는 틸리히의 신학은 ‘답변의 신학’이요 그의 신학적 방법론은 ‘상관 방
법’임을 살펴보았다. 그에게 하나님이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초월하며 동시
에 존재하는 것과 상관되는 ‘존재 그 자체’이었다.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이
란 ‘궁극적 관심’(The Ultimate Concern: 여기 대문자에 주의하라)이다. 
이 번호에서 틸리히의 주요 사상인 ‘이성과 계시’ 그리고 ‘존재와 그리스
도’의 상관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이성과 계시의 대립을 주로 논하였지만 틸리히는 
이 두 가지 사이에 어떤 상관 관계를 수립하려 했다. 이성은 그 자체를 뛰어 
넘어 계시로 향하게 되어 있다고 하며, 이것은 바로 이성이 지니고 있는 갈등
과 물음을 극복하려는 모습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성이 계시에 대항하
지 않으며 계시는 이성을 다시 종합하기 때문에 이성은 계시를 필요로 한다”
고 말한다. 계
시를 향한 이성의 모습을 틸리히는 ‘자율’(autonomy), ‘타
율’(heteronomy), ‘신율’(theonom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율이란 
이성이 본질적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성 자체만을 주장하는 것이고, 타
율이란 본질(essence)이라는 이름하에 어떤 외부적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고, 
신율이라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자율과 타율 사이의 대립의 해결이라고 한
다. 자율적 이성은 본질적 이성과 연합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존재 아래에서
는 결코 완성할 수 없고 단지 그 연합을 추구할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추구
가 바로 계시를 필요로 하는 요청이라고 한다. 이 계시란 바로 우리에게 가
장 ‘궁극적 관심’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 계시의 방편으로는 자연, 역사, 집합체, 개인, 언어 등을 포함시킨다. 이
러한 것은 계시 자체와 동일시 되지는 않지만 그 자신을 넘어서 신비로 향한
다고 한다. 그러므로 단지 어떤 언어 자체가 계시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다. 만약 계시의 방편이 그 자체에 계시의 능력이 있다고 할 때는 이미 계시
의 신비를 지표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요 오히려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이라

고 한다. 계시란 어떤 제한적, 존재적 실재를 통해 나타나지만 존재하는 어
떤 것도 계시를 방해할 수 없고, 계시는 그러한 것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를 방해하는 것은 ‘마귀적’(demonic)이라고 한
다. 이러한 계시의 내용은 어떤 상징(symbol)과 비슷하다고 한다. 모든 계시
의 방편은 유한적 상황에서 주어지지만 그 유한성을 부정해야 하며, 그 부정
을 통해 그 유한성을 극복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극복된 계시는 존재의 근
원(ground)와 연합된 계시라고 한다. 이러한 ‘최종적 계시’는 바로 그리스
도 예수의 계시라고 한다. 예수는 궁극성을 주장하려는 모든 유혹을 피했
고, 자신을 십자가에서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유한성으로 우리
를 주장하려는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최
종적 종교’(final religion)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것을 부인했
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최종적 계시는 아니지만 그 계시를 증거한
다고 한다. 이러한 계시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틸리히에게 그리스도란 역설적 실체이다. 성육신(신-인)이란 바로 존재의 

한성에 굴복되지 않으면서 존재의 모습으로 나타난 역설적 실체라는 것이다. 
물론 틸리히는 주장하기를 역사적 예수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다고 한다. 이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뒷 배경’(picture)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유한하고 고뇌하고 죄있
는 예수가 자신을 부인하며 존재의 근원과 연합된 그 모습 혹은 배경
(picture)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존재
(new being)가 있다고 한다. 

간단하나마 이러한 틸리히의 신학을 살려보노라면 그의 신학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존재의 유한성, 역사성, 모호성 등을 해결하기 위해 단
지 그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그 존재의 문제를 초월하며 해결하는 ‘존재 그 
자체’로 정의하였지만 이러한 하나님은 존재의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
는 것이다. 단지 틸리히같은 인간 스스로가 자위하는 것에 불과하다. ‘존재 
그 자체’란 존재하는 인간 자신의 투영에 불과한 것이다. 창조주이시며 전능
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대신 그와 비슷한 전능한 신을 추론하려고 하다
가 결국 ‘존
재’가 아닌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정의한 것이다. 사실 
틸리히의 신학적 구조는 헤겔 철학에 근거한다고 하겠다. 존재 혹은 경험의 
모호성(ambiguity)은 그 해결을 위해 어떤 절대성을 향한다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헤겔 철학이다. 한편 모든 객관적 범주를 초월하는 ‘존재 그 자체’의 
神개념은 일종의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겠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주체/객체를 초월하는 분으로 말한다. 물론 하나님은 모
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틸리히가 정의하는 ‘존재의 근원’ 역
시 초월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어떻게 ‘궁극적 관심’이 혹은 ‘존재 그 자
체’가 주체/객체를 초월하는 지 틸리히는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어떤 
식이든지 우리가 ‘하나님’ 혹은 ‘궁극적 관심’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한다
는 것은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객체가 되신 것을 의미한다. 사실 하나님을 
한 존재로 본다고 해서 하나님은 유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바
로 전능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시고 우리의 존재를 낳게 하신 창조주이신 것이
다. 끝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정
의하고 역사적 예
수의 존재는 별의미 없는 것으로 보는 틸리히의 기독론은 일고의 가치가 없
다. (지면이 부족해서 이렇게 짤라 말합니다. 틸리히의 기독론은 일고의 가치
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