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신학(Secular theology) 

0
194

정승원 목사(합신 조직신학 교수)

8. 세속신학(Secular theology) 
대표적 세속 신학자로 우리는 하비 콕스(Harvey Cox)와 죤 로빈슨(John A. 
Robinso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특별히 창조적으로 신학을 발전시켰다기 보
다는 이전에 여러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상들을 종합, 적용시켰다고 하겠
다. 특별히 이들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ffer)의 영향을 많이 받았
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입했다가 잡혀 감옥에서 죽은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옥중 서신에서 기독교인은 세속에 참여해야 함을 강조
했다. 세상에서의 안주로서의 참여가 아니라 고통을 감수하는 사랑의 참여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종교없는 기독교’를 주장했다. 이것은 하나님, 교
회, 혹은 예배가 없는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구별된 사회에
만 그리스도를 가둬 놓지 말자는 말이다. 그리스도도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과 내세적인 것에 너무 마음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본회퍼의 주장들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이
라 할 수 없지만, 세속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아 비성경
적 세속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로빈슨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말
이 바로 ‘세속’을 의미한다 하겠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 표현을 위해 하
나님의 영역에만 있어서는 안되고 세상의 영역으로 세속화되셔야 한다는 것이
다. 로빈슨은 천상에 계신 하나님의 개념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고 
무의미하다고 한다. 새롭게 된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리고 교회와 세계간의 선은 지워져야 
한다고 한다. 밴 퓨르센(C.A. van Peursen)은 말하기를 “세속화란 인간의 이
성과 언어위에 군림했던 종교와 형이상학으로부터 해방 되는 것”이라고 한
다. 

한편 하비 콕스는 그의 책 “세속도시”(The Secular City)에서 “하나님은 교회
에 있지 않고 세상에 있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

적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 하나님을 발견한다”라고 주장한다. 또 주장하
기를 “하나님의 왕국―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인간성―은 모든 장애가 무너지
는 곳마다 발견된다. 즉 종교적 장애, 도덕적 장애, 사회적 장애가 없어지고 
기독교와 비기독교사이의 차이가 사라지고 형제애가 다스릴 때 발견된다”라
고 한다. 그는 죄를 어떤 법이나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해
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한다. 그리고 아담의 죄는 피조물을 다스
리고 정복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주장하기를 “현대의 특징은 도시 문
명의 발전이요 전통적 종교의 붕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과
학과 기술의 발달때문이었다고 한다.

한편 세속신학의 운동 일환으로 우리는 1975년 하트포드 신학교에 여러 학파
의 신학자들이 모여 발표한 ‘하트포드 선언문’을 들 수 있다. 이 선언문 중 
중요한 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오직 현대적 인간성 모델로
만 이해할 수 있다.’ ‘제도화나 역사적 전통은 우리의 참된 인간성을 억누르
며 참된 인간성과 반대된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해방은 진정한 실존과 진정
한 종교를 요구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계획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 선교의 규범이
다.’ ‘사후에 관한 소망은 인간의 성취 이해와 무관하던지 별의미가 없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얼마나 현대 신학자들이 세속신학적인 가를 알 수 있
다.

사실 세속 신학은 중요한 신학적 학파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신학의 망령이 알게 모르게 기독교를 위협하고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교회
에도 깊숙히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신학의 가장 큰 위험성은 바로 하나
님을 하나님되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
다. 무조건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즉 세속적)인 것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도 분명히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과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선교와 구제가 그런 것이고, 빛과 소금의 직분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세속주의 신학은 오히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과 의무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왜냐면 하나님
이 부정되고, 초자연적인 것이 부정된다는 것은 결국 교
회가 부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세상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세속 
주의에서도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사랑,’ ‘Missio Dei’ 등등
의 개념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세속주의는 인간
의 자율성나 자유에 근거를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는 
다름 아닌 타락된 죄성일 뿐이다. 사랑, 정의, 평화, 하나님 등의 초월적 개
념의 근거를 죄악된 인간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세속주의가 모든 종교적, 형이상학적 틀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외쳤지만 
사실 세속주의 자체가 인간 자유를 보장받으려고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종교적, 형이상학적 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틀은 砂上樓閣과 같이 얼마 
못가 무너질 틀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 보수주의자들은 극단적 이원론
에 빠져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을 등한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주
권이 온 세상을 덮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우리는 세속주의자들보다 더 세상을 
향한 걱정과 책임과 의무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세상은 결국 우리 
선교의 현
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