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불트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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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원교수의 현대신학해설

루돌프 불트만 (2)
지난호에서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의 파라다임을 가지고 성경을 재해석하는 
불트만의 신학을 논했다. 계속해서 그의 대표적 신학적 작업인 ‘비신화
화'(demythologization)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신화’란 일반적으로 ‘실제로 
역사속에 발생된 사건은 아니지만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진 꾸민 이야기’라
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
적 기록을 다 신화로 돌린다. 즉 진짜로 역사속에 발생된 사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트만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성경을 바라본다. 신화란 시간적인 것으
로 영원을 묘사하는 것이며 인간의 것을 가지고 신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이라
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대부분의 기록을 신화로 본다. 예를 들어, 천
국, 지옥, 기적, 초자연적 사건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에게는 이렇
게 성경의 초자연적 내용을 신화로 보는 이유가 따로 있다. 단지 신화이기 때

에 우리에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지난호에 언급하였듯
이 실존주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역사적이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실존적 해답을 찾을 길이 무엇이냐가 중요
한 것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성경이 쓰여졌을 시대와 다르다는 것을 불트만은 강
조한다. 즉 현대인은 성경의 신화를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현
대인은 과학적 세계를 믿고, 라디오를 사용하며, 아프면 약을 먹지 초자연적 
세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1세기 유대인의 세계관은 삼층적 우주관이었다
고 한다. 즉 우주는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 지옥의 삼층 구조로 된 것으
로 믿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시적 우주관을 가지고 그들의 ‘자이해'(self-
understanding)를 표현한 것이 신약의 신화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
적 우주관을 가진 현대인을 위해서는 이러한 신약의 신화를 ‘비신화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불트만에게는 ‘신화’라는 것이 이전의 자유주의 신
학자들과는 다르게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에게 신화란 일종의 
실존적 표현
인 것이다. 현대인이 성경에서 진정한 실존적 해답을 얻기 위해
서 원시적 세계관에 의해 주어진 성경의 신화적 내용을 비신신화시켜야 한다
는 것이다. 이렇게 비신화화 작업을 함으로써 우리 시대에 맞는 형태의 메시
지, 즉 케리그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신약의 메시지를 재구성하거
나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수를 에워 싼 신화를 벗기고 케리그마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불트만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언급한다면, 그는 주장하기를 어
떤 텍스트(text)를 대할 때 ‘전이해'(preunderstanding) 없이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대한 물음에 의해 하나님을 생각하
고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물음은 우리가 찾는 답
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물론 불트만에게 실존적 물음이란 단지 인간에서 
시작되어서 인간으로 그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계
시와 같은 것이다. 초월적 계시의 성격을 띤 실존적 물음인 것이다. 다시 말
하면 초월적 하나님은 인간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실존) 대한 물음을 통
해 인간과 연결이 된다
는 것이다. 불트만에게는 이러한 실존적 ‘전이해’야 말
로 성경 시대와 지금 시대의 차이를 극복하고 우리에게 진정한 케리그마를 제
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석학적 접근 방법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인위적 범주
에도 구속되지 않고, 과거의 객관적 가르침에 매이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Sitz)에서 자신의 결단에 상응하는 케리그마를 얻겠다는 실존
주의적 접근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적 발상에서는 불트만의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
니라, 초역사(Geschichte)안에서 나에게 새로운 ‘자이해’를 허락할 때에 비로
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음안에서나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나를 구원하였기(즉 실존적 해답을 주었기) 때문에 하
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
라고 주장한다. 그의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역사적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실존적 메시지(케리그마)에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실존을 위협하는 세상, 고뇌, 죽음의 힘을 극복하는 것이 십자가의 메
시지이지 그리스
도의 피로써 우리가 구속받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

끝으로 간단하나마 불트만의 신학을 평가하자면, 그의 양식비평에 있어서 복
음서의 기록들이 여러 구전들과 이야기들의 편집이라고 하지만 사실 예수의 
죽음 이후 복음서의 기록까지 그러한 여러 구전들과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관한 그의 해석은 어떤 합리적 증
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철학적 추측에 근거한다고 하겠다. 또한 
사실 현대인이라고 해도 전혀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진리
는 자연적인 것에만 있는 것으로 말하는 불트만의 철학적 가정은 일방적이고 
또한 그 역시 과학적 세계관에 대해 맹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불트만은 신
학에 있어서 어떤 일반적인 범주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을 반대한다. 즉 성경
의 대부분 언어들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불트만이 쓰는 언어도 자신의 철학, 신념, 전제 등이 들
어있다. 그는 슐라이어막허처럼 어떤 주관적 또한 실존적 순간을 계시로 보는
데, 그 순간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것인가?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그 순간
이라는 것이 사라지게 마련이고 실존적 의미가 사라지고 일반화가 되는 것이
다. 마찬가지로 단지 성경이 과거의 기록이라고 해서 그것을 추상적이고 구체
성이 결여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객관적인 것이 왜 우리 믿음의 보
증이 되지 못하겠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객관적인 보증은 (예를 들어, 언
약 같은 것) 우리의 믿음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불트만이 주장하는 예수님
의 신성이나 구원에 관한 교리는 예수가 ‘나에게’ 어떤 가치를 지녀야 한다
는 리츨 신학과 별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주관주의가 확실한 객관적 증거(성
경, 자연 계시, 역사 등)보다 더 나을 것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것
은 단지 ‘내가 법이라’는 불트만 개인의 자율성에 불과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