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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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원교수의 현대신학해설

먼저 여러 독자분들께 주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2001년 새해를 맞이하시
면서 귀댁과 섬기시는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
다. 그 동안 현대신학 해설을 애독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보수 진영에
서는 ‘현대 신학’ 혹은 ‘자유주의 신학’ 하면 무조건 멀리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자세는 현대 신학을 잘 알고 멀리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대 신학을 알면 알수록 우리 보수 신학의 진가가 
더 살아난다고 저는 믿습니다. 아무쪼록 이 ‘현대 신학 해설’이 여러 독자분
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계속적으로 애독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
다. “The world is changing, but the Word is eternal!” (세상은 변해도 하
나님 말씀은 영원하다!)

(5) 바르트의 구원론
바르트 신학에 관한 글은 이 번 호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제5권에서 구속론에 관해 따로 집필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했
다. 그러나 이
미 언급한대로 바르트 신학의 초점은 기독론에 있다. 그의 계시
관, 신관, 역사관, 모두가 바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지
금까지 다룬 내용 역시 구원론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바르트에게는 그리
스도야 말로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말
이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전적으로 자유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즉 인간과의 사랑의 교제 사건)에서 비로서 자신을 나타나도록 작정하셨다
는 것이다.

물론 바르트는 말로는 성경에 나온대로 ‘화목’이니 ‘중보’니 ‘구속’이니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의미하는 바는 성경과 다르다. 어떤 ‘사랑의 행위 혹은 
사건’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신학에서(특
히 아퀴나스 신학의 전통에서) 주장해 왔던 ‘존재 유비'(analogy of being)
를 반박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서 우리가 모르는 하
나님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바르트는 ‘믿음의 유비'(analogy 
of fait
h)를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바
로 하나님 자신의 나타나심인데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현실화된다
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알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알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가 말하는 화목이란 바
로 그리스도 자신이 ‘선택하시는 하나님'(electing God)과 ‘선택받은 인
간'(elected man)이 동시에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죄 없으신 참 하나님이 
참 인간이 되셔서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사랑의 교제를 의
미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서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셨음을 말하는 것
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되시기로 스스로 선택하셨다는 것이
다.

그래서 바르트는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e)
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받고 또
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유기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역시 유기된 
인간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겪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는 ‘예’가 있고 ‘아니오’가 없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저주는 마치 
사랑하는 아들을 더 이상 크게 혼낼 수 없을 정도로 혼냄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랑을 최대한으로 보여주는 역설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안
에서의 유기는 바로 선택을 확정짓는 행위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그리
스도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요 인간과의 
교제라 한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보편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
런 보편적 구원의 방편으로서의 믿음이란 일종의 그리스도안의 ‘참
여'(participation)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여’ 사상은 사실 이미 플
라톤 철학에서 나타난 사상이다. 참 인간은 신과의 참여로 발견된다는 것이
다. 바르트의 참여(혹은 교제) 개념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
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을 만나는 것(참여)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한 것이다.

한편 바르트는 역사적 인물로 나사렛 예수의 삶을 ‘초역사’가 아닌 일반 역
사로 본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역사는 오직 간접적인 계시라고 주장한다. 예
수가 죄가 없다는 것은 그가 죄없음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요, 그런 기준은 일
반 역사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고 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동일시 한다. 즉 일종의 행위 혹은 사건을 존재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것이
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죄없음을 그의 대속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
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인간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는 상관없이 십자가 사건 자체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구원관은 성경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반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구원을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보지 않고, 어떤 無의 위
협에서의 해방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사건’ 혹
은 ‘행위’를 유일한 실재(reality)로 보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만드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보편화시키고 또한 하나님의 실재적 구원의 섭
리를 추상화시켰다고 하겠다. 또한 이렇게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유
지하려고 한 바르트는 오히려 하나님을 범신론화 내지는 단일론화(예를 들어 
구원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시켰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