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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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원 교수

(4) 바르트의 역사관 -계속
이 전호에 이어 바르트의 역사관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바르트는 두 종류의 역사를 말한다. ‘일반 역사'(Historie)와 ‘초 
역사'(Geschichte)이다. 후자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역사라고 한다. 즉 창조
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 성경의 사건들이 우리 구원과 관련되는 진정한 
믿음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식의 역사가 아니라 초역사에서 발
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성이 결여된 사건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것
을 바르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 일반 역사가 아니
라 간접적 개념인 ‘초 역사’를 도입한 것이다. 직접적 개념의 일반 역사로 보
자니 하나님의 초월성이 상실될 것이고,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만 한정하자니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될 어떤 힘이(예를 들어 신앙, 결단, 종교성 등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결여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초역사의 개념을 도입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과 관련하여 바르트는 두 
종류의 이야기를 구분한다. 신화
(myth)와 사화(Saga)이다. 신화란 실재적으로 발생되지 않았던 것이지만 우리
에게 뭔가를 남기는 이야기를 말하고, 반면에 사화란 어떤 역사적-과학적 진
단을 초월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 사화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발생되
었을 수’도 있는 것으로 깊은 차원에서 진리에 다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바르
트는 주장하기를 성경에는 신화는 없지만 사화는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창
세기 1-2장과 부활 이야기는 사화라고 한다. 이 Saga도 마찬가지로 간접성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신화처럼 상상적인 것도 아니요, 실재로 발생된 역사적 
사건도 아니다. 단지 ‘발생되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바
르트가 ‘발생되었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건이 일반 역사에서 발생
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발생 되었다’ 혹은 ‘발생 
되지 않았다’는 것은 Saga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발생
되었냐,’ ‘발생되지 않았냐’가 아니라 그것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초역사적 
의미를 지녔느냐는 것이다.

바르트
의 종말론 역시 그의 역사관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종말은 달력의 
시간에 나타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지적했듯이 그렇게 되면 
그 종말은 진정한 의미가 결여되고 우리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는 것
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예수의 재림은 이미 부활과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한
다. 그에게 재림이란 어떤 ‘심판’을 의미한다. “마지막 때가 가까왔다” 라는 
말은 모든 삶이 신적 심판아래 있기 때문에 항상 ‘위기'(crisis) 아래 있다
는 말이라고 한다. 바르트의 신학을 ‘위기의 신학’이라고 말할 때는 바로 ‘신
적 심판’이 그의 신학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어떤 심판인가? 바로 ‘전적 타
자’인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는 (간접적으로 혹은 초역사적으로) 그 자
체가 심판인 것이다. 물론 이 심판이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말하는 ‘선악간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역설'(paradox)과 같
은 것이다. 키에케고르는 인간과 영원한 질적 차이를 지니신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는 그 자체를 역설로 보았다고 하면 바르트는 그것을 심판 혹
은 위기
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종말이란 현 삶의 궁극적 차원을 
보여주는 어떤 은유(metaphor)와 같은 것이다. 한편 우리가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어떻게 받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간접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바르트의 역사관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먼저 우리
는 왜 의미있는 사건은 우리가 아는 식의 역사에, 즉 달력의 시간에 발생되
지 않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의미있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초월성을 
가지고 있다. 시간을 초월해서 현재나 미래에 의미를 부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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