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

0
196

<정승원 교수의 현대신학해설>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 1813-1855)
보통 ‘키에르케고르’ 하면 자유주의 신학자 보다는 복음주의 신학자
로 통한다. 물론 그의 신학에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자로 불리우기에는 그의 신학에 비성경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또한 그의 신학은 여러 현대 신학자들에게 은근히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살아있을 때 보다 죽은 뒤 몇 십년 지나
서 더 유명하게 되었다. 그의 신학은 특별히 바르트와 불트만에게 리츨주
의(Ritschlianism)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고 실존주의
(Existentialism)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르트는 ‘만약 한 사람의 철학을
택하라면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한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는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복음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
다. 그의 주안점은 어떻게 관료적이며 형식적인 교회안에서 참 기독교인
이 될 수 있는 가에 있었고, 특별히 헤겔이 기독교를 철학적 체계
로 추락
시킨 것에 많은 비판을 가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장하기를 어떤 추상적 개념을 가지고는 개인의
존재와 행동을 바로 묘사할 수 없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 개인의 결
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그
결단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묘사라고 한다. 또한 기독교의 교리 역시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개인적 결단으로 봐야 한다
고 한다. 이런 결단과 관련해서 그는 ‘진정한(authentic) 믿음’과 ‘不진정
한(inauthentic) 믿음’을 구분한다. 진정한 믿음은 역설적(paradoxical) 결
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논리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을 위해서는 어떤 ‘건너 뜀'(leap)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를 ‘종교 A’와 ‘종교 B’ 두 종류로 나누는
데, 일반적 종교와 형식적인 기독교가 ‘종교 A’에 속하고, 오직 믿음으로
다스려지는 참다운 기독교가 바로 ‘종교 B’에 속한다. 이 진정한 종교는
어떤 증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믿음
위에 근거한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이 그 예라고 한다). 비록 ‘종교 A’ 는
하나님을 단순히 관념으로 생각하지만 ‘종교 B’는 하나님을 인격으로 본
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 B’는 단순히 성경과 같은 어떤
명제적(propositional)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한다. 종교적 명제란 참
믿음 없이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적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많
은 강조를 한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wholly Other)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으로 무한한 차이'(qualitatively infinite
difference)를 주장한다 (이것은 바로 바르트 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반
면에 하나님은 또한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 있는 동시대성(同時代性)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참 하나님은 과학이나 철학, 즉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오직 ‘정열적 內性(inwardness)’에 의해 알 수 있는 분
이라고 한다. 또한 역사 역시 어떤 개연성은 제공하지만 믿음처럼 확실성
은 제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계시의 역사성을 부인하
는 것이
다. 오히려 그는 주관적 계시 이해와 그리스도에 향한 순간적 믿음을 주
장한다. 그는 ‘만약 한사람은 참 하나님의 예배당에 올라가서 참 하나님
의 지식을 갖고 기도하지만 거짓 영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우상이 가득한 집에서 기도하지만 영원한 자(하나님)에게 진지
하게 기도한다면 누가 더 참 믿음을 가진자냐?’ 물으면서 바로 우상 앞에
서 기도하지만 참 하나님에 대해 기도하는 자가 참 믿음을 가졌다고 말
한다. 참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잘못 기도하는 것이 우상 숭배라는 것이
다. 이렇듯이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객관적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아
니지만 객관적 계시나 진리보다 개인의 주관적 결단이 믿음의 정수요 참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을 크게 두 가지로 비판할 수 있다. 첫
째, 그는 신앙에 있어서 계시적 명제(성경)의 중요성을 간과하는데, 하나
님이 주시는 객관적 계시와 인간 개인이 갖는 주관적 이해 내지는 결단,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확실한지는 사실 자명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는 단지 개인의 실존적 결단의 필
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계시의 확
실성과 역사성까지 부인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성경의 권위를 전적
으로 부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 혹은 실존적 믿음이 자신
에게는 확실한 것처럼 느낄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러한 믿음은 오히려 근
거없는 주관적 과신이나 착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개인적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믿음의 그런 개인적
특징은 먼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역설적 믿음을 참 된 믿음의 모델로 제시하는데,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개인적 신뢰와 결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그에게 명령하신(계시하신) 언약의 하나님의 미쁘심에 근거한
것이었다. 둘째, 키에르케고르는 역사, 철학, 윤리 같은 분야에 어떤 중립
성(neutrality)을 부여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의 사고나, 역사나,
윤리를 초월하는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사고나 역사나 윤리 모든 것에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 마음의 결단만을 주
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영역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떠나선 어떤 중립적인 영역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의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좋
은 신학적 도구를 제공했다고 하겠다. 특별히 그의 ‘역설적 믿음’이라는
개념은 복음적인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개념은 계시의 역사성과 그리스도
의 인격과 사역의 역사성을 주관적 성찰로 하락시키고 하나님의 초월성
이나 영원성을 순간적 참여나 내재성(immanence)과 별 다를 바 없는 것
으로 보는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