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 배경(5)- 정승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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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5
정승원 교수

1. 슐라이어막허
(F. Schleirmacher, 1768-1834)
흔히들 슐라이어막허를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는 모라비
안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개혁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도 경건주의
의 영향을 받았지만, 학생 시절 그는 칸트철학과 계몽주의에 심취되었고,
1790년 목사 안수 받은 후 당시 새로운 운동인 낭만주의에 매료되었었다.
당시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정, 상상력, 직관 등을 강조하였다. 그는 기존의
정통 신학은 지식층에게는 전혀 호소력이 없다고 믿었고 그래서 좀더 그럴
듯한 기독교를 만들려고 했다. 그는 한편 단순히 신학을 철학적인 것에서
추론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또한 기독교를 단순히 도덕적인 것으로 추락시
키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기독교 교리와 고백서에 관
심을 가졌고, 기독론에 많은 관심을 두기도 했다. 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
해서는 먼저 그의 신학의 핵심인 “감정”의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슐라이어막허는 종교의 핵심
이란 바로 ‘절대 의존의 감정’(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이라고 주장한다. 기존의 정통 신학을 ‘위로부
터’ 신학이라 한다면 당시 계몽주의적 신학은 ‘아래로부터’ 신학이라고
할 수있다. 슐라이어막허는 정통주의 신학은 인간적 권위로 포장되었고 인
간의 창조력과 자유를 질식시키고 교회의 교리를 하나님과 혼동시켰다고
믿었다. 이런 것에 대항한 계몽주의는 옳았지만 그 대안으로 나온 자연신
론(Deism)은 오히려 메마른 자연주의적 신앙으로 인도하여 일종의 종교철
학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두가지 전통과는 다르
게 그는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 경험의 인간적 성찰이라고 정의하며
새로운 신학의 길을 개척했던 것이다. 즉, 교리가 아닌 종교적 경험이 신학
의 진정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감정’이라는 경
험적 개념을 이용하여 ‘위-아래 연결’ 신학을 이루어 보고자 했던 것이
다. 그가 말하는 “감정”이란 단순히 인간이 감성적으로 느끼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깊이 있고 심오한 의식(conscious ness)을 의미
한다. 그것은 어떤 사고나 감정 
이전(以前) 혹은 그 밑에서 발견되는 것이
라고 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의 핵심은 모든 유한한 것들이 무한한
것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존재하며, 모든 일시적인 것들이 영원한
것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직접적으로 의식
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 감정은 모든 인간안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이성이나 양심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이성은 과학을 낳고, 양심은
도덕을 낳고, 감정은 종교를 낳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러한 슐라이어막허의 주관적(subjective) 신학의 틀은 어떠한 주장들
을 담고 있는가를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의 신학은
“종교 다원주의”와 연결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와서 현대 신학자들과
종교가들은 “종교 다원주의”가 무슨 새로운 것인양 법석을 떠는데 사실
종교 다원주의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슐라이어막허의 신학에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객관적 계시(성경)가 신학의 핵심이 아니라
주관적 절대 의존의 감정이 핵심이라면 굳이 기독교만이 참 진리의 종교라
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슐라
이어막허는 모든 종교가 이러한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각기 다른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어느 것도
거짓된 종교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 그는 주장하기를 기독교가
가장 발전된 종교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우월적인 생각은 당시 서구 문
명의 우월성이나 백인 우월주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일이라 하겠
다) 그는 기독교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앙으로 정의되는 ‘의존’의 종
교라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를 깨닫는 의식이 바로 그 ‘절
대 의존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에서는 그리스도의 인
격과 사역이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바로 개인의 주관적 의존 감정인 것이
다. 그러므로 만약 슐라이어막허가 지금 살아있다면 문선명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통일교도의 감정과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를 깨닫는 감정사이에
큰 차이를 두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관적 의존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막허에게는 하나님이란 단지 종교적 “감정”을 인간
과 함께 정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실재
(reality)에게 주어지는 이름
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
의 범신론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속성이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
한 것이며, 우리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정수에 대해서는
말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슐라이어막허는 삼위일체란 하나
님이 인간과 갖는 여러 다른 관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성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은 삼위가 아니라 같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관
에서는 어떤 초자연적인 것(기적, 하늘나라, 영적 세계, 천사, 악 등등)이
부정된다. 하나님의 초월적 세계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세계(인간)
와의 관계에서만, 특히 “감정”에서 발견 된다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