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기독신자의 정서와 트로트 찬송_이수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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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신자의 정서와 트로트 찬송

< 이수환 목사, 화평교회 부목사 >

“찬송은 우리의 감정 절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

 

이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는 예배 중에 항상 “시편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시편찬송”을 처음 부를 때는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 이전까지 부르던 찬송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제가 ‘시편찬송을 부르고 복음송을 부르지 않는 교회’에서 사역한다고 하니, “어떻게 성령을 훼방하는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냐”며 정색을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이렇게 시편찬송을 통해 은혜를 누리기까지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1년간 복음송을 거의 듣지 않았고, 전혀 부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뜻밖에도 큰 애에게서 나타났습니다.

큰 애가 두세 살 쯤 되었을 때, 어떻게 하다가 제 컴퓨터에 있는 어떤 복음송을 눌렀습니다. 컴퓨터로 자주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일로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애가 어찌하나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큰애는 복음송을 잠시 듣고 있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복음송이 울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찬송에 대한 감수성은 단지 음악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뒤로 지금 사역하는 교회에서도 시편찬송을 종종 부르고 있고, 집에서도 되도록 가정 예배 때 시편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트로트 찬송”에 대해 여러 말들이 있습니다. 트로트 찬송만큼 위험한 것, 어쩌면 더 안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자기 흥에 겨워, 자기 기분에 따라, 자기 감정에 사로 잡혀 부르는 찬송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집중은 사라지고, 자기가 부르는 노래와 자기가 연주하는 악기에 빠져, 말 그대로 찬양이 아닌, 노래와 연주에 빠져드는 찬송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사를 보면 시대마다 이런 찬송들은 늘상 있어왔고, 또 그 찬양은 멈출 줄 모릅니다. “성령이 인도하신다. 성령이 이끄신다”라고 말하지만, 자기 감정에 취해 그 감정을 고조시키다 결국 뒤에 이어질 설교 시간에는 모두 지쳐 잠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 집회들에서 흔히 보는 일들입니다.

자기 감정을 쏟아 내는 것은 그냥 세상의 노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트로트는 최고입니다. 그게 일본에서 온 것이든 아니든, 트로트는 우리의 감정을 쏟아내고 고양시키고 폭발시켜서 카타르시스를 주는 면에 있어서는 최고입니다.

개인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음악은 세대별로 다릅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야 트로트에 그렇게 흥분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음악을 듣습니다. 트로트이든, 힙합이든, 록이든, 발라드이든, 심지어 클래식도 인간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흥분시킨다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찬송은 인간의 감정을 폭발시켜서 카타르시스를 주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찬송은 인간의 감정을 억제하고 절제하는 일에 목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억제하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이 찬송입니다. 더욱이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부르던 찬송들은 ‘예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훈적이라는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 찬송을 통해 청중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폭발하면 들리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입으로 소리를 내어 하나님을 찬송하지만, 그 때에도 우리의 감성은 최대한 절제되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주신 말씀에 대한 신자의 정서적 반응”이어야 합니다. 즉, 먼저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 말씀에 대한 반응, 회개나 결단 등의 반응이 찬송을 통해, 기쁨으로 혹은 감격으로, 때로는 감동의 눈물로 곡조와 함께 고백되는 겁니다. 그 곡조를 통해 어떤 반응을 이끌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 상당수는 우리의 감정을 쏟아내는 것에는 좋지만,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입으로 소리를 내며 심령으로는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 찬송이 엉뚱하게도 ‘곡조’에 의해 방해 받기 때문입니다.

멜로디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어떤 멜로디는 가사를 드러내지만, 어떤 멜로디는 가사 대신 감정만 자극하다 끝납니다. 그래서 찬송은 가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가사를 담아내는 그릇, 장르와 멜로디도 가사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최소한 찬송이라면, 찬송이 끝난 후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잘 들었습니다”라는 의미의 ‘아멘’이 아닌, 신앙고백으로서의 ‘아멘’이어야 합니다. 그저 부르고 난 뒤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만, 혹은 흥겨움만 남아서는 그것을 가리켜 “찬송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찬송’의 문제는 더욱 더 진지하고 신중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