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제뉴어리(January)를 위한 서곡_김수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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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뉴어리(January)를 위한 서곡

< 김수환 목사, 군포예손교회 >

“세상 모든 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림자에 불과해”

 

옛날 로마의 1월은 신 야누스의 제사로 시작된다. 로마인들은 지상에서 가장 순결한 날이라고 생각되는 정월 초하루를 택해 로마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야누스의 신전으로 올라가 야누스를 위해 제사를 지내며 1년을 시작한다.

희랍 12신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주신(主神)만큼은 수입신이 아닌 자신들만의 신을 갖길 원했으며, 그렇게 급조하여 만든 신이 바로 야누스이다. 야누스는 두 개의 머리를 갖고 있으며, 집이나 도시의 출입구를 지키는 신으로 표현된다. 그러기에 야누스는 문의 신이며, 출발의 신이다. 새해의 시작인 1월을 로마인들은 야누스의 달, 즉 야누아리우스(Januarius)라고 불렀다. 1월을 의미하는 영어의 제뉴어리(January)는 바로 이 라틴어의 야누아리우스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구정만 되면 온 세상이 행렬로 북적인다. 양력 신정만으론 해가 바뀌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매년 살기에 어렵다고 하면서도 해마다 구정이 되면 백화점도 터미널도 고속도로도 운동회 날 만국기 펄럭이듯이 명절 물결로 넘실거린다.

양력으로 치면 해가 바뀐 지 한 달이 다 되어서 오는 구정이 되어서야 비로소 해가 바뀌는 것이 실감이 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사무실에 앉아 대부분의 일들을 온 라인(on-line)으로 처리해버리는 최첨단 디지털 시대의 끝자락인 오늘날에도, 구정 명절만큼은 아날로그로 지켜야 그 분위기가 살아나니 말이다.

이제야 비로소 완연한 새해이다. 신정으로도 구정으로도 명실공이 해가 바뀌는 순간이다. 대망의 청마호(靑馬號)가 닻을 올리고 출발선에 서있다.

우리는 해마다 새해가 되면 나름의 큰 꿈을 안고 희망의 산에 오른다. 반드시 이루어야만 된다는 꿈을 향한 비장한 각오는 진지하다 못해 제단 앞에 선 참배자처럼 경건하기까지 하다. 마치 새해 첫날 야누스의 신전에서 향을 사르며, 제사를 지냈던 옛 로마인 못지않은 신선함과 경건함으로 희망의 산 앞에 당도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등산의 끝을 알고 있다. 아니, 알아야 한다. 그 대망의 등산은 허무의 하산으로 결론 나야 하는 것, 곧 그것은 꼭 정상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서 하차해 버린 사람만이 아니라 꿈을 이루고 정상을 정복한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꿈을 이루든, 좌절하고 실패하든 우리 인생 등산의 결과는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무리 아름답고 거창해 보여도 참 실재가 아니라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러니 그 그림자를 붙잡고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 물론 이 세상의 물질세계도 땅의 역사도, 우리의 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땅의 것들은 하늘의 것들을 발견하라고 잠시 주신 것이지, 결코 땅의 것을 전부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땅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 그게 바로 지옥(地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에게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저주를 내리셨다. 가장 무서운 저주는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땅과 땅의 것들에 갇혀서 하늘의 세계를 모르고 살면 가장 무서운 저주가 되는 것이다.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이 땅에서 하늘의 세계를 깨닫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영혼의 그릇에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그 분의 생명과 성품으로 사는 것이요,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신령한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첫 단계가 바로 땅의 것들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세상의 헛됨과 무상함을 체험하지 않으면 하늘의 세계를 향해 걸음마를 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땅의 세계를 허락하신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왜 나는 구원자가 필요한가?’를 배우라고 주신 것이다.

“약할 때 곧 강하다(고후 12:10)”는 말씀이 있다.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예수님을 붙잡음으로 강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자신을 비롯하여 세상이 그림자(허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참 실재되신 주님을 붙잡고 허무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제물자체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제사의 정신과 태도의 문제에서 기인된 것이다. 아벨은 자기 이름(헤벨)에서와 같이 인생의 허무함을 인식하고, 유일하게 그 허무를 해결해주실 하나님을 붙잡았다는 사실이다.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정월 초하루 야누스 신전 앞에서 제사하는 로마인들과 같이 각자가 이루어야 할 꿈과 목표를 갖고 희망의 산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결과는 ‘허무’여야 하기 때문이다.

전도서 기자는 말씀한다.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 이니라”(전 12:13).

해마다 산에 오르내리기만 하고 허무를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허무를 극복하고, 참 실재이신 주님을 붙잡을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