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낙스와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이승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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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요약 2>

요한 낙스와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이승구 교수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는 1) 제의적인 것만 중요시하는 교회로 나아가 결과적으로 삶과 예배를 분리하며, 이 제의주의는 2)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행함이 동시에 요구되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를 드러낸다. 또한 3)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영적인 것, 즉 영성을 개발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것과 4) 교회의 직제들이 성경이 말하는 형태와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스코틀랜드 하딩톤에서 태어난 낙스는 Dunblane 주교에 의해 천주교 사제로 임직하고 공증인과 가정 교사 역할을 하던 중 당시 스코틀란드의 왕이던 제임스 5세가 죽고 난 후 Mary Stuart의 섭정인 James Hamilton의 통치 기간에 그의 궁정목사 Thomas Gilyem(Gwilliam)에 의해 개신교로 개종하여 George Wishart(1513-46)에 영향을 받는다.

 

낙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Wishart가 St. Andrews에 있던 Beaton 추기경의 명령으로 화형당하자, 비톤 추기경을 살해하고 St. Andres 성에서 항거하던 개신교 혁명가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의 개입으로 개신교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낙스는 120명의 항거자들과 함께 19개월 동안 프랑스 갤리선을 젖는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몸이 약해져서 풀려난 그는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천주교의 미사를 공격하였다.

 

가톨릭의 화체설에 대항하여 성찬 요소들은 실제 몸과 피가 아니며 절하는 것은 온당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내용이 제2 기도서의 각주(Black Rublic)에 들어가게 하는데 기여한 그는 개신교에 반하는 Mary Tudor가 즉위하게 되자 800여명의 개신교도들과 함께 대륙으로 도망하였다. 당시 크랜머, 리들리, 라티머 등은 300명의 개신교들은 화형과 고난을 당하였다.

 

칼빈과 불링거(Bullinger)를 만나 우상 숭배하는 통치자와 여성 통치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하며 고민하던 낙스는 칼빈의 격려로 프랑크프르트에 있는 영국 피난민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중 기도서를 따르는 예배를 드릴 것인가 좀더 성경에 충실한 것인가의 문제로 이 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제나바로 돌아가 제나바판 영어 성경 편찬 작업을 하게 된다.

 

스코틀랜드에 성경적 장로교회가 세워 지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한 낙스의 생애를 더듬어 가면서 우리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의 예배와 교회의 제도를 바꾸어 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를 절감하게 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