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석의 북카페| 교회의 ‘하나됨’과 교리의 ‘하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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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WCC를 비판하는가

 

교회의 ‘하나됨’과 교리의 ‘하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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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호, , 지평서원, 216쪽, 2012년|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

 

“진리에서 하나 됨과 우주적 확산이라는 본질적 요소 결여가 문제”

 

 

책을 소개해 달라고 전화 청탁을 얼마 전에 걸어왔다. 그런 청탁받은 기억이 한둘은 있지만 책 소개로 이어진 적은 없다. 내가 소개하고 싶거나 읽어야 할 책을 중심으로 이 난이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청탁자에게 먼저 물은 말은, 그 책이 어떤 책이냐는 것이었다. WCC 비판서라 하였다.

 

195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은 WCC를 찬반으로 하여 연동측(통합교단)과 승동측(합동교단)으로 갈라섰다. 이 과정에서 당시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은 큰 상처를 입었고 또 입히기도 했다. 진리 싸움은 신학자들의 몫이었지만 그 내용을 잘 모르는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는 감정 대결이 우선했다. 이 분열은 교회 재산 분쟁으로까지 번져 볼썽사나운 장면을 여과 없이 사회에 노출시켰다. 어제의 교인이 오늘의 원수로 돌변하는 비상식도 난무했다. 이 수치를 결코 망각하거나 역사에서 지우려 하면 안 된다.

 

그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지금이다. 2013년 가을이면 부산에서 제10차 WCC 총회가 열린다.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제1차 총회를 가진 이래 2006년에 이르기까지 아홉 번의 총회가 열렸다. 이 과정을 통해 WCC는 자기의 정체와 노선을 더욱 분명히 드러냈다. “WCC의 전반적 양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다른 종교와 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종교다원주의가 사실상 수용되고, 교회의 사회참여라는 명목으로 세속주의와 상대주의가 절대 가치로 여겨진다.”

 

지은이의 비판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서술된다. 제2장에서는 WCC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간추려 놓았고, 또 WCC의 정체도 무엇인지 간략히 다룬다. 제3장에서는 WCC의 에큐메니칼 신학을 비판한다. 이 부분이 본서의 핵심 내용에 해당한다. 그가 다루는 내용으로는 성경론,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교회론, 성례론이다. 기독교 전반에 관한 것이 비판의 대상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제4장에서는 WCC의 교회 일치론의 부당성을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성경적 에큐메니즘과 WCC의 에규메니즘의 차이를 제시함으로써 전자를 추구하고 후자를 비판하려 한다. 즉 “성경적 에큐메니즘은 진리에 관한 하나 됨과 그 진리의 우주적 확산이라는 두 가지 본질적 요소를 가질 때 참되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WCC는 이런 점을 간과하고 교회의 가시적, 기구적 일치만을 현상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다 읽고 난 내 나름의 소감은, WCC가 선언한 텍스트들을 하나하나 검토한 지은이의 결론에 따라 WCC는 복음에서 떠났다는 것이다. 복음은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핵심인데 이 복음을 왜곡시킴으로 신학전반도 왜곡을 가져왔다. 성경관, 삼위일체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안 걸리는 데가 없다.

 

분명 이 책의 장점은 아직까지 WCC 신학에 대해 교리적, 또는 조직신학적으로 접근하는 시도가 드물었는데 지은이가 그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 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독자인 우리로서는 WCC의 전모를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지은이는 이 책의 독자를 누구로 정하고 논한 것인가. 이 책을 발행한 출판사는 이 책의 대상이 누구라고 생각한 것인가. 추천의 글을 쓰신 분은 글 끝에 이런 바람을 적었다. “이 책을 널리 읽음으로써 한국 보수교회가 WCC 총회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들을 명료하게 알기를 바란다.” 정말 이 책이 그 바람처럼 널리 읽히는 책이 될까. 다 읽은 나로서는 그런 생각이 안 든다. 내용이 나빠서가 아니라 너무 전문적이어서다. 이게 이 책의 한계요 또 무게감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끝으로 우리 자신도 돌아보자. 신학적 비판이 상대만 비판하고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자만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정통 교리로 가지고 있다. 이 “선언적 고백은 고백이 아니라 고백의 비준일 뿐이다”(유해무).

 

그 말은 선언적 고백이 나의 고백과 교회의 고백이 되려면 인간의 부패와 의심과 유혹과 고난과 핍박이라는 조건 속에서 자기의 것으로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고백문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나의 보화가 될 수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