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석의 북카페
아직도 유효할 치유적 모델
공동체
길버트 빌지키언, 신국판, 두란노, 234쪽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편집실장 press@hapdong.ac.kr
회중의 자유로운 참여냐 강한 리더십이냐? 교회 사역에서 회중들의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리더십은 상대적으로 축소될 것이다. 하지만 회중 전체
나 그중 일부가 사역의 기회를 놓치게 되면 지도자의 사역은 강화될 것이
다.
상호 보완적인 참여와 리더십
초기 신약교회는 대체로 받은 은사를 따라 회중이 모두 사역에 참여하였다.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은 말씀 사역이 회중 안에서 풍성히 이루어져서 각 신
자가 말씀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오순절날 베드로가 전한 가르침에 따르
면 모든 사람이 교회의 선지자 사역과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행
2:16-18). 사역에 대한 책임에서 제외되거나 면제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교
회의 사역은 온 회중이 서
로 종이 되어 참여해야 한다. 목회서신을 제외한
나머지 서신서가 그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사역 구조는 지역 교회가 처한 형편과 필요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디모데전후서에 거론된 에베소 교회와 디도서에 거론된 그레데 교회가 그런
예외적인 경우다. 거짓 선생이 일으킨 이단 문제로 인해 강력한 리더십이
그 교회들에 요구되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강력한 리더십을
부여하여 혼란한 교회를 바로 잡게 하였다. 따라서 교회 사역은 일부 사람으
로 극히 제한되었다.
이처럼 교회 사역에서 어떤 교회는 개방된 사역 정책을 취하였고 어떤 교회
는 제한된 사역 정책을 취하였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다 성경적으로 타당
한 사역 구조다. 저자는 전자를 가리켜 표준적 모델이라 하고 후자를 치유
적 모델이라고 한다. 전자는 공동체 리더십에 근거를 두고 있고 후자는 지도
자 리더십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치유적 모델에서 표준적 모델로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강력히 주장하는 요점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 됨의 공
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이단 척결이나 질서가 무너진 교회를
바로
잡거나 새로 시작하는 개척 교회의 경우에는 치유적 모델이 더 적합하다고
말한다.
해석학적으로도 틈이 보이지 않는 이 책은 나를 아주 곤혹스럽게 하였다.
그 이유는 소수로 구성된 사역 구조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 제시
하였기 때문이다. 내?외부적 상황으로 교회가 심히 흔들리는 가운데서 바울
사도가 처방한 사역 구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교회나 장로교회는 여기
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태까지 나로서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다.
칼빈은 아주 힘을 들여 왜곡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직 제도를 바로 잡아놓
았다. 계급 구조를 봉사의 구조로 되돌려놓았다. 장로교회는 이런 전통에
서 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
가?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구라파, 미국 아니 한국의 현실을 돌아
볼 때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목사-장로-집사의 직무가 섬김의 자리뿐 아니라 불행하게도
계급 또는 명예의 자리로 인식되는 실정이다. 직무에 대한 아주 어설픈 인식
이다. 미숙한 반쪽
인식이다. 더욱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우면 섬김보다는
위압적 권위를 내세운다. 여기서 한발 더 떼면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 세상적 계급 인식을 내 안에서 싹 몰아내야 한다.
이쯤해서 저자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야겠다. 그의 주장을 십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과연 치리가 없는 교회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때보다
도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세속주의의 유혹에 감염된 교회가 대다수인 오늘의
현실에서 저자의 주장이 과연 현실적으로 실효성을 거둘 수 있겠는가.
교회는 역사적으로 늘 넘어지는 약한 현실에 처해 있었지 강력하지는 못했
다. 초대교회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외적으로 강력한 리더십이 요구되
지 않을 만큼 교회가 평온한 적은 별로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
와 약함과 악함을 읽어내야 한다.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던 나에게 홍창표 교수님의 예는 좋은 모범이 될 것 같
다. 도미 후 역사적 전천년설에서 무천년설로 선회하였는데 그것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긴 연구 과정을 통해 한 결정이었다고 술회하
신다.
끊임없는 도전과 연구 필요해
치유적 모델에서
표준적 모델로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빌지키언의 주장에 원
칙적으로는 동의한다 해도 실효성에 아직 의문을 갖는 나로서는 그의 책 한
권으로 나의 장로교 전통을 손에서 놓을 만큼 확실한 것을 쥐었다고는 생각
하지 않는다. 다만 씨름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는 셈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