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 없이 큰일과 기이한 일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이슬을 먹는 들에 핀 평범한 꽃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이적이고 초월”
욥기 5장 9절은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라고 말하며, 10절에서 비를 땅에 내리시는 것과 물을 밭에 보내시는 것을 그 예로 든다. 우리 중 누가 비가 땅에 내리는 것과 물이 밭에 이르는 것을 기이한 일로 생각을 할까?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던 40년 동안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함께 내렸다. 자고 일어나 아침에 들에 나가니 먹을 음식이 내린 장면을 생각해보자. 처음 본 사람들은 얼마나 이적으로 알았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이적이라도 반복되면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양보하여 백성들이 40년 동안 이적으로 알았다고 치자. 그런데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떠할까? 이들에게는 만나가 이적이 아니라, 이슬과 같은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자연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오해되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작동되고 있으면 아무리 놀랍고 기묘할지라도 이적이 아니라 자연이다. 요사이 지구 위에 떠있는 인공위성들이 수명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곤 한다. 하지만 지구는 아직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스스로 돌며 떨어지지 않는다. 단순히 자전만이 아니라 같은 정확함으로 태양 주변을 공전하고 있다.
만나와 함께 내렸던 이슬은 지금도 내리는데, 이 이슬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동식물과 사람이 먹고 사는지 모른다. 잠을 자고 아침에 나가기만 하면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 아니해도 매일 이슬이 내려 넉넉하게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이슬은 자연이라 여겨지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지 못하신다.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해도 하나님이 기르시는 들의 백합화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보다 더 하다. 들에 핀 평범한 꽃 하나에 일상과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있는 것이고, 그 자체로 이적이고 초월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이적과 초월임을 아는 우리의 인식이 또한 초월이고 이적이다. 진돗개에게 아무리 이슬과 들꽃이 자연이 아니라 초월이라고 가리켜도 그들은 가리키는 손만을 쳐다볼 뿐이고, 곧 고개를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나사가 화성이나 달에 물이 있다고 말하지만 아직 우주 그 어디에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형태의 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 물이 대기순환을 통하여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어 땅에 내리는 놀라운 이적은 더욱 발견되지 않았고, 땅에 내린 그 물이 밭에 보내져 식물이 자라는 기이한 일은 더더욱 발견되지 않았다.
밭에서 농작물이 자라는 것, 그것이 바로 이적의 만나이다. 광야에 내린 만나는 자고나면 주어지는 것이지만, 밭의 농작물은 우회하여 몇 달의 간격으로 주어질 뿐이지 둘 다 이적이고 초월이다.
하나님은 일반적 방편들 없이도 때로는 넘어서고 역행하면서도 역사하시지만, 우리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시도록 그 일반적 방편들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을 배우고 사람을 배우고 끝내는 하나님을 배우게 된다.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 되어간다.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찾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게 된다.
욥기 5장 11절은 기이한 일로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은 창발적으로 섭리하시어 무심코 쏜 화살 하나를 통해서도 악한 자를 징벌하시지 않는가? 무심코 버려진 물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이곳저곳으로 떠돌다 비가 되어 어느 밭에 들어가 작물을 기르듯, 룻은 우연한 발걸음을 통해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은 대책 없이 창조하시지 않고, 창조하신 그 엄밀함만큼 섭리하신다. 창조의 다른 이름이 섭리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은 하나님께서 작정을 어떻게 실행하시느냐 하면 ‘창조와 섭리의 사역을 통해 하신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을 매우 좋게 만드신 하나님은 단순히 창조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섭리도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4장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에 지혜와 선하심이 그대로 배어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그 지혜와 선하심으로 만물을 섭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에 있어서 다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어떤 이유를 가지신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그 지혜와 능력과 절대에서 오는 자유로움으로 하신다.
인문이든 사회이든 자연이든 모든 과학자들은 그 자유로운 능력과 지혜와 선함으로 정하신 하나님의 법칙을 조금 찾아내고서는 놀라운 발명을 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뿐이다. 이들이 발명을 할 때마다 그 자유로움과 지혜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진돗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을 지으신 후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가장 귀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며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셨는데, 그 마음으로 돈과 권력과 명예만을 추구하는 일은 큰 죄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상이고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들 중 하나를 결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로 평범한 것이라 여기는 그 하나를 갖게 하지 못함으로 그것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이고 기이한 일인가를 알게 하신다.
나는 부족함이 많다. 건강도 남들처럼 한두 군데 안 좋고, 보낸 생애에도 흠과 굴곡이 깊게 패이곤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부족함과 험악함을 인하여 이슬이 이적임을 알고, 일상이 기쁨이고 감사임을 조금이나마 안다. 바울도 그 가시가 없었다면 자만한 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약함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온전하여지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