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성경 기록의 독특성과 진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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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기록의 독특성과 진실성

 

김영규 목사·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성경 기록 믿지 못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모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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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있어서 감추인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였다’(신 29:28, MT)는 말은, 칼빈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들의 경우 모든 피조물들의 행위들의 방식들과 목적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modus)과 목적(finis)에 의해서 일하신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천사들에게든 인간들에게든 어떤 일들이 우연으로 보이는 일에 있어서도 일어난 일들의 질서(ordo)와 근거(ratio, causa), 목적(finis)과 필연성(necessitas)이 하나님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피조물들에게 드러나고 계시된 것, 혹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것은 모두가 피조물과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사람들에게 우연히 보인 것이나 본성적 필연성으로 보인 것들은 실험과학 정신에 의해서 거의 해체되고, 혼돈이 자연에 가까운 법칙으로 발견되며, 질서 밖에 빈 공간들이나 환경들의 경우의 수들이 또한 그런 질서들을 결정하는 필연적 인자들로 사려(思慮)해야 하는 것이 자연에 보다 가까운 질서들의 진실한 모습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고전적 의미에서 여전히 사용이 되고 있는 필연성이나 우연성과 같은 개념들은 오늘날 의미가 없게 되었다.

 

자연의 질서나 그 질서 밖의 세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극 미시세계와 극 거시세계에서 그 모든 것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찾고자 하였던 인류의 모든 시도들이 현금에 와서 오히려 인류로 하여금 큰 좌절감을 맛보게 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 빈 공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양자역학에 의해서 소거(消去)하고, 물질의 무게나 에너지 혹은 시간을 소거한 나머지 마지막 발견되는 절대적 공간까지 소거하여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을 때 바로 거기에서 찾아오는 그 좌절감이다.

 

물론 기업 활동을 하거나 평범한 시민 생활을 꾸리는 자들에게 그런 좌절감을 경험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혹 그런 좌절감을 경험한다고 해도 그런 경험은 그들의 지각활동이나 지적활동에 전혀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만물의 진실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그런 좌절감은 그 의미가 켜져 갈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면 제네바에 있는 거대 가속기로부터 소위 모든 만물의 물질입자들의 무게를 결정하는 힉스 입자(Higgs boson)가 발견이 된다고 해도 그 좌절감은 더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향성 자체의 오류나 판명성의 오류, 더 근원적으로 우리가 정보를 입수하는 정보방향의 오류에 의해서 인간화된 여러 가지 개념들, 예를 들어 에너지 개념, 온도의 개념, 시간과 공간의 표상들을 가지고 대부분 언어의 유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과학에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과학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과학에 과거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과학적 이론들도 일시적으로 한꺼번에 무너지는 상황 아래에서 거대 질서들에 속한 인문학의 주제들은 더 심오해졌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인문학적 사고나 이해로의 회귀란 있을 수 없고 마지막 남아 있는 그런 사고나 이해까지도 지금까지 발견된 비가역적 사실들에 의해서 분명히 무너져야 한다.

 

즉 모든 인문학적 사고의 대상들이었던 거대 질서들은 엄밀한 과학에 의해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탈 근대화라는 이념이나 운동만 있고 해결점이 없다면 그런 이념이나 운동은 또 다른 회의주의나 허무주의에 불과할 뿐이다. 많은 인간 인자들에 의해서 거품이 섞인 기존의 과학적 이론들도 물론 그런 과제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분명히 방해가 될 것이다.

 

인문학의 재발견은 기존 과학적 이론들을 충분히 비판할 수 있는 초과학적 진리를 제시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의한 인문학의 자기 비판적 작업은 참된 인문학을 위해 절대 필요로 한다.

 

신학의 경우 더욱 더 그렇다. 성경의 기록이나 사실들은 절대적이라고 믿어야 한다. 세계의 진정한 진실들과 성경의 모든 사실들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이방인들이나 모든 신자들에게 기독교는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된다. 특히 목사나 신학교수가 그렇게 믿지 못하고 설교하거나 가르쳤다면, 그런 직책 수행은 거짓 행위로서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참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들은 인류 역사들 가운데 인간에 의해서 생산될 수 있는 기록문화 중 그림과 같은 셈족이나 다른 문화민족의 기록방식들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로 대표되고 있다. 창조에 대한 기록도 그렇고 가인의 범죄도 그러하며 창세기 10장도 그렇고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들에 대한 기록방식도 그렇다. 복음서 기록들이나 사도들의 서신들도 헬라 로마 사회의 기록들이나 편지들에서 만날 수 없는 창조적이며 유일하며 탁월한 기록물들이다. 그것이 환경과 인간들에 대한 것일지라도 기록 내용들은 모든 시대의 인간들에 의해서 도저히 관찰될 수 없는 신적인 지각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의 기록들을 과학과 역사로부터 분리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들으며 만져보고 느끼지만, 외부 정보들이 모아져서 우리 안에 뿌려지고 그런 지각들 자체는 분명히 자연에도 없고 공기의 운동이나 빛 자체나 우리의 뇌에서 정보들이 전환되는 과정에도 없다. 정보의 수단들은 늘 변하여도 정보의 원형은 잘 모른다.

 

더구나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극 거시세계와 극 미시세계가 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고, 소유로 느끼고 있는 세계는 모두 그 중간세계이다. 우리가 인과론으로 풀고 있는 모든 세계가 다만 그런 중간세계일 뿐이다.

 

인간은 시작과 끝으로 있지 않다.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성경의 사실들은 그런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는데 놀라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