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시대를 앞서는 그리스도인의 합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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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는 그리스도인의 합리성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그리스도인의 합리성은 모든 세대 인간의 삶을 압도하는 것”

 

국제적으로나 국내외적으로나 많은 희생을 치러서라도 정의와 진리에 대한 싸움을 싸우고자 하는 일에 모두가 지쳐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기독교 역시 그런 환경에 민감하여 고유한 진리에 대한 싸움을 거의 포기하고 시대정신이나 사회환경에 잘 적응하는 방향에서 스스로 숨어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기독교는 일상의 삶에서나 대 사회 앞에서 다른 종교들에 비해 극도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특별히 그런 기독교 안에서도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의 정신은 인류가 끊임없이 실패했던 요소들을 모아서 거절하며, 거절된 것들 뒤에 극도의 비현실적인 이상을 극대화시키며, 그 이상으로부터 어긋난 어떤 시대정신들과도 타협하지 않는 집요성을 자랑하면서 외로운 싸움을 싸워가는 것을 그 특성으로 삼은 정신이다. 

 

그런 극도의 비현실적인 이상 중에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나 생각이 그것이다. 그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만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비타협적인 집요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현대사회의 경향과 그 요구와 비교할 때,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극도로 비효율적인 요인들만을 움켜쥐고 사는 사람들과 같다. 과연 그런 것인가? 요즘 사회에도 단순히 투자 대 생산효율이나 노동생산효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투자 대 질 높은 생산효율이나 질 높은 노동 효율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국가의 세금은 국민의 세금이고 많은 노동력과 생산력의 대가들이 모아진 것이다. 그런 세금을 국가가 사용할 때 분배의 높은 합리성도 중요할 것이지만 질 높은 생산효율을 이끌어 내는 일이 더욱더 중요할 것이다. 이는 국가나 공공기관의 부채, 공기업의 부채 그리고 사기업들일지라도 국민의 세금만을 집어삼키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국가적 위기 앞에 뼈를 깎아내는 단기적 구조조정은 궁극적 대안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분배의 높은 합리성을 저해하고 질 높은 생산효율을 낮게 하는 장기적이고 깊은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상생하자, 소통하자란 구호는 좋지만 그런 요인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정책 대안들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그 구호들은 오히려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만을 계속 심화시킬 것이고 스스로의 자신감을 잃어갈 것이다. 

 

그런 장기적이고 깊은 요인들 중에 세계경제나 지구환경문제 등과 같은 가장 직접적이고 급한 문제들에서 찾을 수 있는 요인들이 우선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 저변요인들로서 국민교육문제가 여전히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교육 방침으로 볼 때,  어릴 때의 교육은 건강한 성장과 재능의 발견 및 틀리지 않는 교육이 그 특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좋고 성장시의 교육은 자유와 책임을 향한 교육, 사람이 얼마나 틀릴 수 있는가를 배우는 비판적 교육, 인류가 풀지 못한 문제들을 풀고자 가능한 빨리 도전하는 모험적 교육이 그 특성으로 추천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지난 6월에 Science 잡지에 ‘맛’을 연구하는 한 여성 과학자의 프로필이 소개된 적이 있다. 그 프로필에서 한 여성 과학자가 처음 과학소설을 읽다가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나 여성직업에 대한 주변적 편협성 때문에 심리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맛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며 박사과정에 들어가 지도교수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같은 지도교수의 희생에 의해서 맛과 관련된 혀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과학자의 한 일생을 통해서도 기존의 학설들이나 견해들을 파괴하는 자신의 발견들이 점점 더 근원적으로 그렇게 틀리다는 사실이 발견이 되었고 심리물리학을 넘어 뇌 과학, 유전학, 식품공학에까지 통섭적 학문활동으로부터 얻은 결론은 “개념적 실수들을 저질은 일들이 새로운 통찰에 이르는 기막힌 창문일 수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재능이 발견이 되어 명장이 되고 명공이 되는 일도 교육의 성공적 예들이 되겠지만, 그렇게 처음부터 특별한 재능이 발견이 되지 않아도 계속적 평생 교육의 과정을 통해서 인류의 어려운 과제들을 조금씩 풀어내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면, 그것도 교육의 성공한 예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교육과 삶은 그렇게 크게 구별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육과 직업이 구별이 되고 삶과 직업이 구별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건축설계에서만 전체로 흐르는 아이디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직업, 직업과 삶이 전체로 흐르는 미래 인간 사회의 이상이 지금 모든 이들에게 필요로 한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로 흐르는 미래 인간 사회의 삶의 질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리스도인들 뿐이다. 바로 그런 자유가 그리스도인이 갖는 극도의 합리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