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인간의 퇴보와 진정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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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퇴보와 진정한 발전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고난의 때가 하나님의 열매 맺는 절호의 기회”

지구촌에서는 지금 사람들보다 강아지나 고라니, 토끼와 같은 애완동물들이 
더 TV를 즐기고 있다. 우리 집의 토끼도 마찬가지로 TV를 켜지 않을 경우 밥
을 달라고 졸라대지만 TV를 켜면 조용하고 밥을 주지 않아도 TV를 즐긴다. 

사람들은 점점 퇴화 향해 가고 있어

특별히 어린이프로와 뉴스들을 좋아한다. 가족들은 아무도 TV를 보지 않지
만 우리 집 토끼만은 TV를 본다. 동물들은 문화동물이 되고 사람들은 점점 
더 퇴화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은 모두가 일자리가 없으면 일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불안해하고 당황
해하고 있다. 인류는 아직도 죽음이 은총의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영혼만이 남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하나님의 은총은 계
속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자리가 없다고 수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고 우리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종일토록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하
는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호흡할 공기가 있고 발
로 설 수 있는 땅이 있으며 어디에나 마실 물이 있으며 생명을 유지할 수 있
는 자연이 있다. 그것들만 있으면 이웃과 함께 고통을 서로 나누며 웃으며 
하나님께 감사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동물들은 본능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고자 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께 전적으
로 의존적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 창조자 없이는 한 순
간도 그 형상을 유지할 수 없는 더 크게 하나님께 의존해야 할 피조물인데
도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자유가 바로 자신의 지혜인양 그 자유의 확대로 죽
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다면 그것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감수해야 할 것이
다. 
자연에 하나님의 은총이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수고하고 고통하며 
죽지 않는 것이 그의 책임이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일해야 할 책임이 
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얻을 소득과 보상이 전혀 다른 데 있음
을 가르치고 있는 이상 세상의 어떠한 고통과 수고도 그리고 죽음도 그리스
도인들의 고유한 기업과 소득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
다. 
죽기까지 인내하며 오래 남아 있으면, 오래 참음이란 성령의 열매라도 맺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영광스러운 삶이다. 어려운 환경에도 기뻐하고 웃을 
수 있다면, 더욱 더 큰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증거들이다. 고난의 때가 바
로 세상의 것들로 부요할 때는 맺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열매들만을 더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는 처음부터(주전 3 천년 전후) 자신의 무덤에 그의 옷과 신발, 먹던 숟
가락, 그리고 그것으로 수고했던 바늘, 돌 항아리를 남겼고 여유가 있을 때 
즐겼던 놀이기구도 남겼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종교생활과 연결되어 특히 셈
족은 암양을 드리고 각종 물류들과 금속들을 받거나 교환하였다. 그리고 인
류는 그렇게 오래 전부터 개인인감, 관인, 직인을 통해서 사적이고 공적인 
생활을 보증하였다. 
그러나 그런 공적인 생활은 성경의 마지막 시대인 
로마 황제시대에 오면 로
마시민들이나 공직에 관련된 것들을 제외하고 각 종 세금 이외에도 여행에 
필요로 하는 각 종 물건들, 책들, 필경판들, 문자로 기록된 모든 것들, 식량
들, 짐승들, 가죽신들과 인장고리에 이르기까지 반입 반출의 세금을 내야 했
다(Lex portorii Asiae). 
민주사회에 와서도 그런 행위들은 여전히 정당화되어 인류는 인재로 인한 심
한 고난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런 고난들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전혀 영
향을 끼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물들은 그 고난들을 통해서 그리
스도의 형상을 창조해 가시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속성들이 그들에게 그의 은
택들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난까지도 사람의 속성 일깨워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 고난이란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