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물리학과 신학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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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신학의 만남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계시는 더 생생하고 크게 부각될 것이다”

영혼이나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안에서 밖을 보거나 느끼는 자유공
간이, 유상기하학적 존재들의 한 특이한 정보방식인 DNA의 정보방식에서 발
견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런 공간은 물
리학과 생물학 사이의 경계선에 대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으며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외부 정보
들이 안으로 들어와 뿌려주는 방식에 의해서 기본적으로 밖을 향한 임계공간
(critical space)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중심물음이기 때문이다. 

불분명한 물리학과 생물학의 경계선

그런 비판적 공간이 단순한 물질의 구조에서 찾을 수 있는 힘의 공간들과는 
전혀 다른 자유와 자율성의 기본적인 형식이라면, 이런 자유성이나 자율성
의 
근원을 어떤 원리에서 찾아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과학자들의 오래
된 과제이기도 하다. 
파인만(Feynman)은 에너지 전달에 있어서 힘의 입자들 사이의 입자들이나 에
너지를 교환하는 방식에 임의성을 부여하여, 물질의 근원적 상태에 어떤 자
유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 문제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임의성
은 생명체에 있어서 자유성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안에서 밖
을 보거나 느끼기 위한 대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갖는 행위나 차원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소원자핵 밖에 있는 전자가 3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150 아토초 
동안 도는 공간인 아토세계에는 그런 형식이 존재하지 않고, 분자들이 전자
들에 의해서 결합된 나노세계나 미크로 세계와 같은 거시세계에서만 그런 형
식이 등장하는 문제가 먼저 풀려야 한다. 
필자는 앞선 칼럼의 글들에서 절대운동이나 절대속도가 어떤 속도들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 바 있다. 그런 일은 등속과 가속이 같아지는 절대운
동이나 절대속도에 들어간 순간 기존차원에서 한 차원이 더 열리기만 하면 
가능하다. 
비록 광자 자체는 중력입자와 
같은 근원적 입자들의 절대운동에 의해서 기본
적으로 절대운동을 하고 있는 입자라고 알려져 있고, 최근 가상입자들
(soliton, dromion, ghoston 등)의 발생에 대한 수학적 해석에 의해서 문제
를 풀려고 하는 경향과 다르게, 그 광자들이 우리 절대세계(Cm)인 절대운동
으로 전자와 같은 입자를 만든 순간에 한 차원이 열려서 전기장과 자기장이 
동시에 생겼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광자들이 절대속도로 그런 두 차원들을 
열고 수축되어 말려져 있다가 어떤 일정한 에너지의 준위에 와서 광자들이 
파장으로 튀어나올 때, 그 순간 광자가 절대속도로 나온다는 사실이 자연스
럽게 가정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어떤 근원적 에너지의 운동이 절대운동에 의해서 수축하여 중
력입자들을 형성한 순간 두 차원이 열렸을 때, 안으로 끌어들이는 공간이 생
겼을 것이고 그 수축된 입자들은 그때 처음 스스로 운동할 수도 있을 것이
다. 그런 상태는 타임머신과는 다른 개념이다. 
만약 한 차원의 운동이 다른 차원을 여는 그러한 절대운동이 정보형식으로
서 거시세계에서도 생길 수 있다면, 정보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이 있고 
그 중심이 없는 어떤 
비판적 공간이 생길 수 있을 것이며, 생명체와 같은 그
물망이 그런 공간의 중심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면, 언제든지 세포
막에 여러 가지 채널들이 생기듯이 좀더 큰 생명체의 경우에는 귀나 눈이 생
길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의 세계가 아닌 다른 절대운동을 가진 영적인 세계(Cs)에도 
그런 차원들이 열리면서 어떤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세계의 정보방식이 우리의 생명체의 정보방식과 결합되어 그 절대속도
의 차이로 인하여 각각 다른 정보단위들을 그 절대속도에 맞게 교환하여도 
서로 볼 수 없고 만나지 않게 지배할 수 있는 형식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계 안에 정보단위들이 어떤 운동이 가능하도록 차원들의 세계가 열
리고 물질의 세계나 생명체와 같이 전혀 다른 차원들이 열려서 공간들이 생
겨야, 비로소 ‘본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절대운동들의 세
계이든, 절대운동들이 여는 어떤 차원들의 세계이든, 그 모두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볼 수 있고 다스릴 수 있으며 소멸할 수 있는 세계로 지어졌다
고 믿어야 한다. 
한 절대운동이나 절대속도만을 고
집하는 것은 너무 좁은 생각이다. 절대시간
이 있다고 해도 절대운동들이 계기마다 차원들을 여는 인과적 순서에 절대
적 시간이 있을 수 있고, 최종적으로 열려진 차원들 뒤에 이미 열려진 감추
어진 차원들이 시간에 있어서 먼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야기되는 시간의식이나 힘의 입자
들이 여러 가지 위상기하학적 공간들을 만들어, 상대적 의미에서 어떤 운동
을 기준으로 하여 다른 운동에 대한 절대적 비교를 통해 보이게 되는 시간과
도 다른 것이요, 근원입자 운동으로 돌아가는 방향인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
는 엔트로피의 시간과도 다른 것이다. 
그런 절대시간은 창조자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처
음 물리학과 신학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언젠가 신학도 물리학처럼 
배울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때에는 신학은 더 큰 과제들을 안고 가게 될 
것이다. 
정보로서만 존재하는 작정의 세계는 어떻게 이해하고, 처음 창조시에 말씀으
로 창조하신다는 개념은 어떻게 이해하며, 그런 작정의 세계에 대한 근원적 
원인인 의지는 어떻게 이해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들은 어떻
게 정의하며, 그 너머 삼위일체 구조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물리학과 신학의 만남 머지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를 부활시키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성경의 일상용어들과 시대의 모든 
신학적 용어들은 더 생생하게 살아 남아 그 의미가 더욱 커질 것이다. 다만 
신자들은 어느 순간이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