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그 인간의 본성_김기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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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그 인간의 본성

김기영 목사_화성교회

개인주의는 모든 제도와 사상을 지배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제도보다 강
한 제도는 본성에서 나온 제도이다. 성향은 제도를 지배한다. 인간의 본성도 
하나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원리로 간주한다면 ‘본성의 이기주의’ 라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기주의는 어떤 주의보다 더 강하다. 봉
건주의, 왕정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그 어떤 주의가 시행되어도 인간의 본
성에서 나온 이기주의를 이기지 못하였다. 우리 시대가 이기주의를 보완하거
나 극복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계속 발생하게 된다. 

개인이기주의 가장 강해

어떤 시대의 어떤 제도도 이기주의를 이기지 못하였다. 공산주의의 실패는 이
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데 있었다. 사람은 공동의 이익을 위하기보다 자기 
개인에게 돌아가는 일에 더 전력을 다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까? 부자의 
것을 나누어준다고 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이 기뻐했을 것이
다. 그리고 
공공의 부요를 위하여 공동 노력을 하자는 것과 또 공동으로 돌아
오는 이익을 공평하게 나누자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론과 행동이 항상 같지 않다는 것을 가끔은 부인하면서 우
리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성과를 높이기 위하
여 공산주의는 상벌의 제도를 시행한다. 그러나 상벌을 정하여 상을 주고 급
을 높이는 그런 정도의 제도로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개인
에게 돌아오는 성과급이 재산으로 환산되지 않는 한 그렇게 힘쓰지 않는다. 
다르게 수고하고 똑같이 나누어 갖는 것을 실제로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까? 100명이면 성자라고 할 수 있는 1명이 실제로 원할까?
민주주의 역시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과제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자유와 개인 재산을 침해하지 않는 정도에서 어떤 세금이나 정부의 제도로 보
완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의 반란은 언제나 잠재되어 있다가 표면으로 나온
다. 
또한 민주주의의 선거란 주민들에게 유일한 선택권이다. 지도자가 자신의 인
기를 위한 선동주의를 이용하여 나갈 때 그 것을 이기지 못하면 사회에 해악
이 
돌아온다. 종종 민중을 선동하여 몰고 가는 영웅같은 사람이 나와서 끔찍
한 일을 저지른 역사를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나 독재자들이 결코 자신의 측근들의 힘만 가지고 권력
을 쟁취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민중을 선동하여 민중의 힘을 이용하였다. 민
중은 역시 개인주의의 우상에 굴복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내 지방
과 내게 이익이 얼마나 돌아오는가를 더 우선시 한다. 집단 이기주의를 극복
하지 못하면 국가는 퇴보한다. 심지어 지도자들이 이것을 이용하면 그 결과
는 모두가 피해자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나 부패는 큰 적이다. 부패주의는 공산주의에서도 여전
히 그 세력을 과시하여서 사회주의 내에서 부패가 사회를 좀먹었다. 부패는 
개인주가 다른 옷을 입고 나온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불의한 이익을 
얻는 것이다. 역시 부패는 개인주의의 다른 모습이다.
권세주의는 어떤가? 사람이 권세아래 있을 때 고통과 압제를 호소하지만 압제
를 받던 부류가 권세를 잡으면 역시 그 권세로 인하여 다른 계층을 압박하여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 간다. 자본주의의 소유주가 노동을 착취하는 경우도 

으며 또 노동자의 연합이 지나치게 힘을 휘둘러 회사가 문 닫게 되는 경우
는 우리가 주위에서 듣고 본 바이다.
반항주의는 분별을 잃을 때 옳은 것까지도 반항을 함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해
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십대의 반항이 자칫 잘못하여 탈선으로 이
어지면 배움의 기회를 잃고 범죄로 빠질 수 있다. 의를 위하여 반항하는 경우
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는 남의 주장에 대하여 반항하는 본성이 있다. 이 반
항이 좋은 목적을 위하여 뭉치면 독립운동 같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
지만 자신의 그룹과 당파를 위하여 목숨을 건 싸움을 하기도 한다. 
향락주의는 어떤 제도 아래에서도 그 힘을 잃지 않는다. 경제가 어려워도 향
락산업은 쇠퇴하지 않는다. 인간의 육욕은 그 힘을 잃지 않는다. 역시 개인
의 탐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향락주의이며 그 위세는 어느 시대이건 나타나
지 않은 적이 없었다. 월남이 북 베트콩에게 망하는 날 전선에서 포탄 소리
가 가까이 오는 와중에서도 그 전날 밤 나이트 클럽에서는 춤추며 마시고 내
일을 잊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한다.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
자는 심리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개인주의의 다른 면이다. 개인주의는 그 숭배자가 더욱 
늘어가는 우상같은 존재이다. 신앙으로 사는 신자의 삶에서도 개인주의는 파
고들어 자리를 잡는다. 신앙의 성장은 이 개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복음의 
힘은 이러한 것을 이기고 뚫고 나아간다. 
칼빈은 정확하게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 설명하였다. 물론 성경에 그 근거를 
둔 신학이었다.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주의는 부패성에서 나온 전적타락이
다. 그리고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님 은혜이다. 기도와 성경의 묵상도 이러
한 은혜를 갈망하는 방편이다. 
우리는 개인주의에서 나온 열정을 가끔 복음과 혼동할 때가 있지는 않은가? 
개인주의자들도 얼마든지 성령충만을 부르짖을 수 있다. 개인주의 자들은 자
신의 성공을 위하여 어떤 고생도 감수 할 수 있다. 개인의 성공, 명예, 개인
의 복을 위하여 철야, 금식하는 것을 숭고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성공 자체
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며 성공은 좋은 것이나 그 목적
과 동기에 따라 평가는 차이가 난다. 

개인적 열정 앞세워서야

그리스도인의 성공은 현세적이나 개인의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남이야 어
찌되는지 나 개인의 편안함 그리고 내세보다 현세의 일시적인 단꿈을 더 바라
면서 예수를 찾는다면 십자가의 예수는 점점 희미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가리워 지는 이유는 우리 신자들의 개인주의가 아닌가? 성공한 크리스
천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면? 개인의 성공이 하나님께 무슨 영
광이 되는가? 여전히 예수를 딛고 올라간 한 개인의 영광만 찬양하게 될 것이
다. 
우리 모든 신자가 개인주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간다면 천국은 
더 많은 영혼들의 가슴에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