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어야 할 장례예식 문화
김북경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총장
교회는 세 가지 임무를 띠고 있다고 한다. 즉 유아세례와 혼인식을 올리는
일과 죽으면 묻는 일이다. 교인을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책임져 준다는 말
일 게다.
영국교회에서는 예배당에 관을 모셔놓고 장례예배를 드린다. 고인의 주검을
앞에 놓고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며 동시에 일
생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공간이다. 관이 앞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기분 상 차이가 크
다. 장지에 가서는 마지막으로 한 줌의 흙을 관 위에 뿌린다. “흙에서 왔으
니 흙으로 돌아가라”이다. 고인의 시체는 구약에서 말하듯 부정한 것이 아
니고 영혼이 떠난 몸이 썩어갈 뿐이다.
시체는 영혼이 떠난 몸일 뿐
요새는 묻을 땅이 없어 화장을 장려한다. 그런데 화장을 꺼려하는 마음은 어
떤 이유에서든지 이해가 간다. 사랑하는 이를 불로 괴롭힐 수 있겠
는가? 그
귀한 몸을 한줌의 재로 만든다? 심지어 예수 믿는 이들도 화장을 꺼려한다.
재로 존재하면 부활할 때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뼈라도 남은 게 있어야 하
나님이 살을 부쳐서 부활시킬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의 어떤 교단에서는 시체
를 곧바로 세워서 묻었다고 한다. 주님이 오실 때 서서 기다리고 있어야 무
덤에서 나오기가 쉽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나는 몇 년 전에 누님을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던 적이 있다. 그 후로
벽제 화장터에는 심심찮게 다닌다. 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에서 가깝고 또 상
당한 분들이 화장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관이 화로에 들어가기 전에 상
주와 조객들은 유리창 너머로 관을 바라보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다.
관을 관망하는 방은 수 십 개가 일렬로 서 있다. 이 때 상주의 종교에 따라
서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방에서는 목탁
소리가 들려오더니 또 다른 방에서는 아이고, 아이고 하는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가 했더니 또 한편에서는 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한 순간에 여
러 소리가 비빔밥이 되어 나왔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을 잘
듣
지 못하실 것 같아 목소리를 더욱 높였고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종교다원
주의가 잘 나타난 광경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장례예식
누님의 재가 담긴 항아리를 장지에 가서 묻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벽제 화장
터에 마련된 영안실에 모시기로 했다. 이 영안실은 한약재 설합같은 것이
수 백 개가 진열되어 있다.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 설합에는 고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작고한 날자가 써있다. 여기서는 젯밥도 드릴 수 없고 예
배도 드릴 수 없다. 다만 설합 앞에 서서 묵도할 수밖에 없다. 재 앞에서 기
도하는 것이 무슨 뜻이 있으랴. 살아있는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는 것밖에
는.
우리 학교에서 조금 더 가면 용미리 묘지가 있다. 최근에 서울시에서 용미리
에 공원을 조성하고 공원 안에서 자유롭게 고인의 재를 뿌리게 한다. 공원
한 가운데에는 기념비가 있는데 여기에는 누구나 와서 고인을 기리는 그야말
로 공동 기념비이다. 선거 때마다 명당을 찾아 조상의 묘를 옮기는 습관과
는 대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