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북경칼럼> 죽음,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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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북경 목사/에스라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죽음,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인가?

나는 최근에 태국에 갔었다. 해변에서 여름을 즐기다 왔다. 인도양의 참사
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빠져 나왔다. 영국에 도착한 후에야 해일이 할퀴고 
간 참혹한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며칠 전
에 거기 있었는데 나는 지금 시공간을 넘어 조용한 시골집에서 이 글을 쓰
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의 위력에 휩쓸려 갔다. 엄마가 없어 졌다. 아빠가 떠
내려갔다. 아들이 없어졌고 사랑하는 딸이 안 보인다. 푸켓트, 아체, 스리랑
카의 해변은 해전을 치른 쓰레기장이 되었다. 그들은 죽어서 쓰레기가 되었
다. 나는 살아서 쓰레기를 본다. 내 허파에는 바람이 들락거리고 내 손가락
은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유가족들은 울고 있다. 나는 웃고 있다. 시체
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은 우는가보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 느껴

인생은 웃음과 울음의 교차이다. 울음과 
웃음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는데 나는 왜 살아있는가?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이다. 시공간
적으로 죽음에 가까이 갔다온 기분이다. 죽음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삶에 대
한 애착과 연장된 생명에 대한 책임을 더욱 느낀다. 
죽음은 산 사람 안에 묘한 심리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죽음의 고통을 외면
하고 동시에 죽음을 미화시킨다. 아픈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일 게다. 영국
의 교회 앞뒤 뜰에는 성도들의 묘와 비석이 즐비하게 서있다. 교회는 죽음
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죽음을 
미화시키지도 않는다.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런데 죽음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죽음이다. 이 패러독스를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실천하
셨다. 그래서 교회는 죽음을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다. 

교회만이 죽음에 도전할 수 있어

어느 꽃가게에서 꽃 배달 주문 두 개를 받았다. 하나는 회사이전을 축하하
는 화환이고 또 하나는 초상집에 보낼 조화였다. 그런데 배달이 잘못되어 회
사이전을 축하하는 화환이 초상집에 배달되었다. 상주가 카드를 열었다. 내
용은 이러했다. “이
번에 이사하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정말 그렇
다. 예수 믿고 죽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서 이 세상에서 저 세
상으로 이사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교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어떤 한인교회가 주일에 빌려 쓸 예배당 건물을 찾고 있었다. 아담한 교회
를 찾았는데 한가지 흠이 있었다. 교회 앞마당에 묘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
다. 성도들이 매주 무덤을 지나서 교회에 들어가야 하는데 교인들이 무덤 때
문에 기분이 상할 것이고 그래서 교회 성장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
었다고 한다. 한번 곰곰이 생각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