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Cool) 권하는 사회_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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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Cool) 권하는 사회

이은상 목사/ 수원노회

소위 요즘 젊은층이 선호한다는‘쿨&섹시’특히 그 중에서도 쿨한 삶은 사람
이 살아가는 일 그 무엇이든 현대사회의 문화의 광장에서 공식이 될 수 있는 
키워드인 듯합니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cool’의 정의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함과 자기 조절능
력 잃지 않기, 너무 열렬하거나 친근한 모습 보이지 않기, 감정의 기복 절제
하기’ 등입니다. 간단한 형용사로 표현한다면 ‘세련된, 멋진, 냉정한, 서늘
한, 뻔뻔한, 침착한, 훌륭한, 가벼운 그러나 천박하지 않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유행에 맞는’ 등의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쿨한 삶이란 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감정에 질퍽대지 않고 집착
하지 않고 솔직하고 깔끔한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얄밉게 자신의 욕구에 충
실하되 남을 해코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쿨은 젊은이들
의 남녀관계 뿐 아니라 가족, 친구, 동료 등 모든 인간관
계에서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소통형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쿨한 느낌으로 포장된 사극‘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가 대박을 터뜨리
고 있다는 소문을 듣는 것을 비롯하여 드라마도 광고도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들의 옷차림에서도 이 사회는 쿨 권하는 사회가 분명합니다. 광고제작과정에
서도 아이디어를 끄집어 낼 때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쿨하냐 그렇지 않으냐
를 따진다고 하는 것을 보면 쿨은 소비적이고 대중적이며 문화상품적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녀관계의 예로 본다면 조선시대는 수절, 청상이요, 근대에는 삼각 관계, 배
신, 책임, 고민이지만 현대인들의 사랑법은 로맨스에 빠질 땐 빠져도 이별 후
에는 전화해서 울고불고 하거나 배신했다고 몸부림치지도 않고 훼방놓거나 못
살게 굴지 않는 그야말로 ‘쿨’인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쿨은 교회 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필자가 
아는 집사님 한 분이 안수집사 장립을 받는데 담임목사님이 각자 삼천만원 
씩 내라고 해서 편안 마음으로 냈다고 합니다. 그
리고 그 집사님은 ‘목사님
도 솔직하고 화끈하게 그리고 자신들도 속편하고 교회에 유익해서 좋다’는 식
으로, 그리고 덧붙여서 그 목사님의 목회경영능력까지(?) 칭찬하는 것을 들
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 편에서 보면 일종의 거래요 흥정이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이 은근히 
요구하는 쿨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교회를 옮기는 문제도 예전 같으면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처럼 자기교회를 끝까지 사수했지만 요즈음은 가깝고 
편리하면 교회도 쿨하게 옮길 수 있다는 주의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그 교회가 싫다는 성도를 굳이 질질 
붙잡지 말고 교회를 옮기기를 원하면 쿨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쿨은 
예배에도 나타나는데 예배형식도 늘어지는 찬송이나 긴 대표기도를 싫어하고 
성령의 감동과 상관없이 예약된 시간에 마쳐야 하며 특히 교회소식 같은 것
은 쿨하게 주보로 대신하고 설교 후에 즉시 축도로 마치기를 원하기도 합니
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대적 사고방식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쿨은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지나친 관계와 과장과 명분을 강요당하던 

난 시절과 달리 쿨은 합리적이고 실리적입니다. 허례허식과 가식적 관계에 집
착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회식자리에서도 남이 싫다는 술과 노래를 권하지 않
고, 대통령도 자격이 모자라면 그만두겠다는(?)그래서 독재를 멀리하는, 정치
인들도 필요이상으로 딴죽걸지 않는 쿨한 정치는 참 좋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도 사람들의 유전과 명분만 고집하려는 바리새적 신앙이나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정신과 상관없이 감정과 흥분(hot)을 중시하는 신비주의를 경계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나 쿨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할 세속적 사고방식입니다. 쿨은 개인주
의를 토대로 자라나기 때문에 기독교가 추구하는 공동체성을 약화시킵니다. 
쿨은 ‘너는 너 나는 나,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그래서 도움을 필요로 하
는 이웃을 외면케 하는 냉소주의를 부추깁니다. 쿨은 끈끈한 정과 사랑으로 
서로 감싸주는 기독교 공동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집단해체 정신
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쿨은 편리함을 지나치게 추구하다 결국 생각 없는, 고민 없는, 버르장머
리 없는, 이것이 죄에 대한 무감각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배우
자가 바람피워도 징징대지 않고 맞바람 피겠다’는 식으로 죄의 도미노현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쿨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랑
을 권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그러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주제 넘는 집요함이나 
지나친 방관도 없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쿨한 습관과 같이 
하지말고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
니다(히10:24-2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