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찡떼오’_ 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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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찡떼오’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 줘. 운이 좋으면 밑둥이 샐지도 몰라’. 일본 선
승의 시입니다. 이 시가 예전에 국민 애송시 1,2위를 달리던 소월의 ‘진달래 
꽃’이나 서정윤의 ‘홀로서기’보다 요즈음 국민들의 마음에 와 닿는 시일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예증은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 가서 폭탄주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
고 사망한 새내기의 모습에서, 전반적인 경기부진에도 불구하고 위스키 판매
량의 폭발적 증가에서, 세계 최상위의 술 소비국의 명예와 음주와 관련된 간
질환 관련 사망률의 세계최고 수준에서. 그리고 19세 미만 청소년들의 음주경
험이 중학생 37.2%, 고등학생 74%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 금주운동이 펼쳐지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 사회는 기기묘묘한 방법으
로 ‘부어라 마셔라’의 문화가 강요되고 있으며 일부대학에서는 죽음을 몰고 
온 광란의 술파티를 자
랑스런 전통으로 여기는 풍조가 그치질 않고 있습니
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서 사회전체가 금주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문화변혁의 자세로 나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술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생
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술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경우 좋은 일에 사용된 음료 및 음식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벗과의 술자리, 먼 길을 걸어가다가 목을 축이는 한 잔의 술, 
농부들의 피로와 수고를 덜어주는 새참 때의 막걸리 등 주로 술은 배부름이
나 갈증해소를 위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농경문화를 멀리한 지금 우리사
회에서는 술의 긍정적인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육체적 질병치료 목적은 제
외) 오직 부정적인 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술은 반문
화적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가 첫째로 술은 주로 불신자들의 일체감과 우의를 다지는 도구로 사용됩
니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 ‘사발식’의 경우 ‘찡떼오(술을 마시면서 찡그리지 
말고, 술잔에서 떼지도 말고, 오랫동안 들고 있지도 말라)’
하면서 선후배간
의 강제적인 공동체성을 요구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것이 일종의 신념으로 
자리잡기도 합니다. 

그 외 개.결강파티주, 글라스 파티주(같은 과의 안경을 쓴 학우들), 불루진 
파티주(청바지 그룹들), 가죽띠주(동갑띠끼리 허리띠를 풀고 무대책으로 마시
는 모임), 장다리 파티, 고향파티, 한지붕(하숙집) 파티 등등 유형무형의 술
잔치들을 보면 술은 모두 불신자들의 모임강화를 위한 도구이지 그 어디에서
도 그리스도인들의 일체감이나 믿음을 위해서 사용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
습니다. 

둘째로 술은 부정적 대인관계로 사용됩니다. 어른들의 경우에도 술은 대인관
계나 사업에 있어서 특히 접대문화와 밀실문화의 최전방에서 위력을 과시하
고 있습니다. 접대문화나 밀실문화는 정직, 투명, 합리성을 배제한 비기독교
적 사업수단입니다. 술대접을 통해서 성사시킨 사업을 하나님께서 친히 도우
셨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없듯이 술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업어디에서도 사
용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술 문화는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아니 거
부해야 할 적대문화라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성경에 술 먹지 말라는 구절이 없다, 스펄전 목사님도 술을 즐겨
하셨다, 서구문화에서 맥주는 음료로 사용한다’ 하면서 술 문화를 가볍게 여
기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할 문화 모델은 서구사회
도 아니고 특정한 목사님도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함(마5:48)과 성령충만입니다(엡
5:18). 이 명령은 신자의 삶의 목표는 술을 먹느냐 마느냐를 따질 차원이 아
니라 더 높은 경지에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더 높은 수준
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목적은 더 높은 차원의 맛을 신자에게 주시려는 것입니
다(계3:2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술에 술탄 듯 물에 물 탄 듯한 신앙의 자세를 버리
고 차든지 덥든지 확실하게 금주를 선포하고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홀짝술도 금하고 곤드레만드레도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
문화를 ‘꿀꺽’할 때 영적으로 ‘꼴깍’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바보마을에서 한 바보가 그만 다리를 헛디디어 넘어지는 바람에 지고 내려오
던 나무가 산밑으로 굴러갔습니다. 산
밑에까지 나무를 지고 먼저 내려왔던 바
보들은 자신들의 미련함을 한탄하며 나무를 지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모두 다
리를 헛디디며 넘어졌답니다’. 

기독교가 그동안 믿음의 선배들이 애써 지켜왔던 철저한 금주신앙을 포기하
고 기준도 가치관도 없이 그저 남이 한다고 나도 따라서 하는 바보마을이 되
어서는 안됩니다. 인격상실의 날카로운 칼인 술 앞에 떨지 마시고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기를 바랍니다. ‘No, 찡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