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과 성도들의 삶
< 김기영 목사, 화성교회 >
“우리도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친히 삶으로 나타내야”
성육신은 성탄절의 중심 사상이다. 그러나 성탄절에만 국한되는 교리는 아니다. 성육신이 하나님 아들이 행하신 사역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성탄절, 고난주간 모두 해당된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있어서 삶의 전체는 성육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이 성육신이라면 성도의 삶은 성육신에 기반을 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육신을 얼마나 이해하고 감사하고 내 삶에 실천하는가? 그리고 성육신의 정신을 그 삶에 얼마나 적용하는가?
성육신을 빼면 기독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나타나듯이 성육신은 우리 성도들의 삶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한다. 성육신은 그저 겸손한 정도가 아니다. 자기를 낮춘다는 가벼운 정도가 아니다.
먼저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와 구속(구원) 사역의 궁극적 목적이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그 뜻대로 창조하셨다. 만물이 그 뜻대로 지음을 받고 그 뜻대로 존재한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 영광을 결코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뺏기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광을 우상에게 주지 않아야 한다. 우상숭배를 범하게 될 때 아무리 택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그 형벌이 엄청나게 무거웠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할 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간구했다. 만일 이 백성을 다 죽이시면 이방나라 민족들이 하나님이 그 백성을 약속의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어서 그리했다는 말을 들을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이방민족들에게 훼손되지 않도록 그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 존귀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서 탄생하신 것이 성육신이다. 이때 하나님의 아들이 버린 영광은 상상할 수 없는 영광, 그 존귀함이다. 따라서 임마누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지극히 낮아지신 것이다. 여기에서 ‘지극히’라는 말은 무한하다는 의미이다.
세상에서 왕이나 포악한 군주들은 자신의 영광이 조금이라도 훼손되면 가차 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권세와 영광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지극히 높으신 영광에서 지극히 낮은 위치로 친히 내려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성육신의 정신은 어떤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성육신에 담겨 있는 그 정신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을 본받아야 한다고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면 마치 성육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다. 자신의 명예, 자존심, 위신 등등, 모두 자기 명예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자신을 낮추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하를 삶에 어느 정도 적용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조금만 낮아져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집을 보증으로 날리고 월세 방에 살면서 심방을 거절하는 교인, OO님이라고 불리다다가 ‘님’자가 적게 들릴 때, 내가 타고 다니는 차가 남보다 못할 때, 부서 회장으로 일하다가 회장 끝나니 참여조차 하지 않는 사람 등등, 말로 하자면 끝도 없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전부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성도들, 또 직분자들까지 성육신의 정신은 왜 그렇게 희박한지 모르겠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몰라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 영광을 지상 목표로 삼고 살아왔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목표로 사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늘 높임을 받다보니 남을 존중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이다. 즉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성도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나타나고 있는가?
낮아질 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낮아질 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