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 앞에 선 우리의 자세_유영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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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 앞에 선 우리의 자세

 

< 유영권 목사, 빛과소금의교회 >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과 신학을 갖고 있는 것이 위대한 것”

 

 

작금 한국교회는 부흥해 왔고,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안팎으로 교회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다.

 

말씀을 붙잡고 있어 듣는 소리라면 죽음으로라도 맞서야 하지만, 말씀으로부터 떨어진 불신앙적인 모습 때문에 듣는 소리라면 심각하다. 교회는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만일 오히려 교회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왜곡이 나타난다면 결코 교회도 성전의 전철을 벗어날 수 없다. 성전의 잘못된 대세의 결국을 우리 교회도 피할 길이 없다.

 

우리 교단은 어떠할까? 합신 교단이 어떠한 교단인지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합신의 신학이 무엇인지 설명이 가능할까? 말하고 있는 신학과 신앙의 정신이 겉으로 보이는 교단의 모습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만나면 이구동성이 아닌 이구이성으로 교단에 대한 말들이 쏟아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아름다운 다양함을 추구함은 마땅하지만, 교단의 정신과 신앙의 근간인 신학과 교리에 대한 반응과 혹은 같은 신학과 교리를 갖고도 다르게 해석하여 적용하는 현실은 우리를 혼동에 빠트릴 것이며, 결국은 하나 됨을 훼손하여 진리를 서지 못하게 하고 말 것이다.

 

떴다하면 흐름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대세다. 터진 둑으로 쏟아지는 물길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흐름을 막을 수 없으니 대세라고 하는 것이다. 대세는 주변과 시대를 평정한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사라지면 다행이지만, 쓰나미처럼 한 번 밀려오면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것이라면 심각하다.

 

대세는 왜 대세인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 때문만이 아니다. 함께하고 싶은 흐름과 분위기의 위력 때문이다. 대세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감을 얻는다. 이성적인 동의를 하게 하고, 운동으로 발전 한다. 모든 것을 마비시키며, 분석을 불능하게 하고, 바른 판단을 불능하게 한다. 오직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다. 대세에 꺾이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동참하는 것이다.

 

역사는 시대마다 발생했던 대세와 엮여 진행되어 왔다. 역사를 역행하게 하는 대세도 있었고, 순행하게 하는 대세도 있었다. 기독교 역사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나타난 대세의 흐름도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대세의 움직임도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를 역행하는 대세라면 성도들은 저항하여야 하고, 온몸을 던져서 막아야 한다. 비성경적, 불신앙적 대세에 저항한다는 것은 죽음과 희생이 각오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대세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도전심이 많은 모험가이든지, 아니면 의식이 분명한 의지의 신앙인만이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엘리야는 위대하다. 전 이스라엘의 부패와 불신앙은 엘리야의 생각과 판단과 저항을 불신앙으로 몰고갈만하다. 이스라엘 앞에 엘리야는 이단아이며, 반민족적인 사람이다. 엘리야의 주장과 소리를 위대하다 할 사람이 없다. 그와 같은 편에 서는 것은 전체를 부정하고 작은 것을 따르는 어리석은 선택이다. 더군다나 엘리야의 주장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대세의 흐름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루터 앞에 로마 카톨릭은 넘을 수 없는 태산이다. 그의 도전과 외침 그리고 저항은 희생이며 죽음이다. 무너질 수 없는 거대한 벽을 향해 돌진하다 부딪히면 터져 없어질 작은 물방울에 불과하다. 루터는 진리를 외치고, 성경을 외치고, 믿음을 외쳤지만 그것이 진리인지 진리가 아닌지 구분해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이단의 외침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도 그렇다. 그를 위대하다 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죽음을 전제하고 불로 뛰어 든 불나방과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다윗은 옳았고, 루터도 옳았고, 엘리야도 옳았다. 외로운 외침이며, 작은 소리였지만, 잘못된 대세를 거스르는 진리였고, 하나님 편이었다. 그리고 이 볼 것 없는 대세에 대한 저항은 또 다른 대세를 형성하였다. 새롭게 형성된 대세는 하나님 섭리에 순응하는 대세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전체의 부패와 불신앙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을 놓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전체에 온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 엘리야의 신앙이다. 성경으로부터 이탈된 신학과 신앙으로 가득 찬 로마 카톨릭을 향해 저항의 외침을 던진 루터의 위대함이다.

 

이들에게 저항보다 더 위대한 것은 가득 찬 불신앙과 불신학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과 신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것에 더하여 자신을 저항체로 던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항은 대세 세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 대세를 이끌고 있는 잘못된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 교단이 한국교회의 잘못된 대세에 저항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교단 안에 혹 존재할 수 있는 거대한 잘못된 대세에 저항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