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을 열며_문상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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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을 열며

< 문상득 목사, 대구영안교회 >

미련한 인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깨닫게 될 때마다 그 오묘함에 
감격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큰 기쁨과 힘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남자
를 위하여 돕는 배필, 여자를 지으셨다”는 말씀도 그 중의 한 구절이다. 

하나님 말씀의 오묘함에 감탄해

태초의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했었을까? 그 궁금증이 풀리던 날, 또 한
번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아담은 그 아내로 말미암아 아내 
사랑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고(엡 5:32), 또 자녀들을 생산하고 그 자녀들
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사랑을 분명 더 잘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뿐
만 아니라 범죄 후에도 진정한 돕는 자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음이 분명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말씀의 지혜를 실제에서 놓칠 때가 무수하다. 그래서 
어리석게 되고, 지탄을 받으며, 낭패를 보고, 여러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
기도 한다. 배필은 비단 부부 관계에만 한정되는 것
이 아니리라. 우리 삶의 
전반에서 그렇지 않는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렇
지 않는가. 
잠언 16장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
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
라.” 사회생활뿐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다. 교회는 공
동체다. 그러나 교회나 노회, 총회에서 우리는 돕는 자의 필요성과 그 중요
성을 부정하는 일이 너무 많다. 모세를 도운 70인의 장로 이야기를 거론하
지 않더라도 말이다. 
어떤 목회자는 장로 세우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당회 없는 당회장이 의외로 
많다. 이유인즉 목회에 도움이 되지 못할뿐더러 스트레스만 더한다고 불평한
다. 물론 걸림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걸림만 되겠는가? 그렇
지 않다면 교회역사의 지혜는 거짓으로 판명되고 말아야 할 것이다. 법도 패
기하거나 개정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목사는 노회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노회는 단지 자신의 목회
에 물질적이나 기타 배경만 되어 주면 되는 것쯤으로 여긴다. ‘노회의 유익
은 서로 협의하며 도와서 교리의 순전
을 보전하며 권징을 동일하게 하고 영
적 지식과 바른 진리를 전파하며 배도와 부도덕을 금지시키는’ 유익한 단체
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목사는 언젠가 시무하는 교회를 어렵게 
만들고,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노회의 도움을 요청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고만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경험상 뒤돌아 보면 문제가 발생하는 교회들의 공통점은 목사의 독선, 전횡 
곧 모든 것을 혼자서 처리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돕는 자들의 권고
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회가 있고 노회가 있음에도 당회나 노
회의 권고도 듣지 않는다. 그 결과 때늦은 후회를 해 보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만다. 
총회적으로도 치리협력위원회 등이 있어 노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도움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고소와 상소 건을 접수하게 된다. 대
부분 고소나 상소건에 의례 빠뜨리지 않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하회가 법
대로 절차에 따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소인의 생각일 수 있지만 실재로 명시된 법대로 하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왜 그렇가? 법에 무지해서
인가? 그렇다면 왜 절차에 대해
서 도움을 받지 않는가. 법을 말하는 것은 은혜가 없는 일인가? 도움을 요청
하는 것이 부끄럽고, 자신의 무지를 나타내는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되기 
때문인가? 
이로 말미암아 물질이나 시간, 신앙 등의 손실을 보는 것이 너무 많다. 그 
중심에 있는 당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목회에 전념해야 할 많은 동역자들
을 피곤케 한다. 대외적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
다. 
그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용되는 비용들도 그렇다. 노회비나 총회비 등은 모
두가 성도들의 헌금들이다. 그 중에는 과부의 두 렙돈도 있다. 필요치도, 
안 해도 될 일들로 말미암아 귀한 헌금이 지출되는 것은 허랑방탕이요 하나
님 앞에 죄악이 분명하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외치는 우리는 그것이 말뿐인, 구호뿐인 외침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
다.

구호뿐인 외침이 되지 않기를

이제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참으로 성도답고 목사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
지, 복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돕는 배필을 주신 지혜롭고 복되신 하나님
의 말씀에 더
욱 귀를 열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