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 따라 설교 평가하는 시대
김원광 목사_중계충성교회
최근에 방송설교를 하다보니 은혜 받아 감사하다는 말들을 종종 듣는다. 그
와 더불어 정반대의 말들을 들을 때도 있다. 일종의 항의성 전화이다. 얼마
전 일이다. 방송을 통해 나간 설교를 듣고 한 분이 전화를 했다. 그분은 전
화 받은 우리 교회 교역자에게 이렇게 항의했다. “방송설교 중에 왜 문둥
이, 혹은 문둥병자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그 교회 목사는 이 용어가 인권위원
회에서조차 사용금지 되었다는 사실도 모르는가?”
설교 용어가지고 항의 받아
그 말을 전해들은 나는 우선 그분이 혹시 내 설교로 인하여 입었을지 모르는
마음의 상처에 대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항의를 할 정도로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사시는 분이 있었지
만 미처 그런 분들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금은 안타까
운 마음을 갖게 된다. “아!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설교를 순전한 마음으로
받지 않는구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한센병을 앓고 계신 분의 면전에서 ‘문둥이’ 혹은 ‘문
둥병자’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그것은 인권을 유린하고 질병 중에 고통하는
성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방송을 통하여 불특정 다
수에게 설교하는 어떤 목사가 과연 일부러 한센병을 앓고 계신 분들의 인권
을 무시하여 그런 설교를 하겠는가?
더구나 ‘문둥병자’라는 말은 현재 우리말 성경에 분명히 사용되고 있는 용
어이다. 그리고 당시 시대의 상황을 표현하기에 훨씬 정확한 단어는 ‘한센
병 환자’보다는 ‘문둥병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인권 보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또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통해 이런 질문을 해 보았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설교란 무엇일
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설교는 더 이
상 선포가 아닌 기호품에 지나지 않은 듯하다. 이제 설교를 듣는 이들은 “이
렇게 설교하라, 저렇게 설교하라”고 지시한다. 심지어 자기 입맛에 맞지 않
으면 설교
자를 공격하기까지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늘 설교하는 사람으로
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설교가 자기 입맛에 맞다 안 맞다 하기 전에 먼
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앞으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란 쉽지 않을 듯 하다.
오늘날은 모든 성도들이 설교를 평가하는 시대이다. 요즘 사람들은 설교에 많
은 해학과 지식, 정보들이 담겨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 말씀이 얼마나 정확
하게 해석되었는가는 그 다음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유머의 사용과 같
은 것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설교의 내용보다는
유머 자체의 강화로 인하여 본질을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현대 교회 목회자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사
람들은 매스미디어와 인터넷 등을 통해 언제든 국내외 저명한 설교자들의 설
교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 더불어 사람들의 귀는 이전 보다 크게 높아졌고
더 좋은 설교를 듣고 싶다는 욕구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설교
자들은 비교가 된다. 그러다 보니 전달 방법도 옹색하고 내용의 탁월함도 없
는 나와 같은 일반 목회자들의
설자리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십분 양보한다 할지라도 말씀이 권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마땅히 설교를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
다. 설교는 흥밋거리가 아니며 사람의 입맛을 채워주는 기호품도 아님을 잊
지 말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딤후 4장 3-4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
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교훈했다. 설교에 대해 내 입맛
에 맞다 안 맞다 하는 것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가 가려워 자기
의 사욕을 좇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닐까? 말씀의 권위는 전하는 자
의 권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설교의 권위는 말씀 자체로부터 나온다.
비록 어린아이의 입술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권위
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나귀를 통해서까지 발람을 책망하지 않으셨던
가?
말씀 자체 권위 인정돼야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쓰다보니 두서가 없는 글이 된 것 같
다. 이래서 글 쓰는 사람
이 아니라 말하는 목사가 되게 하셨나보다. 하여튼
글을 쓰다보니 마음에 조금은 여유가 생긴다. 오늘도 나는 기대한다. “건전
한 모든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이 권위 있게 성도들에게 전달되기
를 그리고 그로 인하여 한국 사회 전반에 새로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
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