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개혁의 선동성_강경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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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개혁의 선동성

강경민 목사/일산은혜교회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사회는 급진적 변혁을 추진해 왔다. 과거의 정치형태
가 얼마나 부패했는가에 대해 모는 국민이 지금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과
거에 대한 전면적 부정은 곧 사회 각계각층의 권위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
고 있어서 세대간의 갈등과 불신의 골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어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개혁은 필연이다. 개혁하지 않으면 민족공동체의 번영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
이다. 민족공동체의 번영 없이는 선교한국의 비전도 없다는 것을 교회는 각성
해야 한다. 교회가 훗날 역사가들에게 수구세력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구
속사의 진전을 위해서도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른 개혁을 위해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 급진적 개혁주의
가 내포하고 있는 선동성이다. 선동이란 사람들을 부추기어 자기 일을 꾸려 
가는 행위를 말한다. 사람들을 부추길 수 있는 타당한 명분이 선동의 성공여
부를 가름하는 핵
심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명분 없이는 선동이 성공할 수 없
다는 뜻이다. 개혁이라는 명분은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한 명제이다. 개
혁이 만능처럼 여겨지기 쉬운 것은 그것이 갖는 명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소위 386세대이다. 40대 초반의 젊은이
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성향을 엎고 정치, 경제 개혁의 핵심적 역할을 독
점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너무 이상적이
고 이론적이어서 현실감각이 뒤떨어진다는 데 있다. 386세대를 가리켜 3.1절
도 모르고 8.15도 모르고 6.25도 모르는 세대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사람들
에게 먹혀 들어가고 있지 않는가.

지금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개혁논리는 좌우를 두루 살피면서 좌와 우에 함
께 있는 양극의 진리를 외면한 채 한쪽의 진리만 강조하는데서 문제의 심각성
이 발생하고 있다. 참여 정부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무는 마땅히 통합과 개
혁을 동시에 붙드는 것이었다.

이념갈등, 계층갈등, 지역갈등을 해소하는 일은 개혁 못지 않게 민족공동체
가 해결해야 할 중심 과제임은 두말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
나 참여 전부는 개
혁이란 이름아래 이념갈등과 계층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세대갈등
까지 부추겨 놓았다.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정립을 위해서도 참여정부는 동일한 우를 범하고 있다.
소위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립은 급기야 외교통상부장관의 갑작스런 경질을 가
져왔는데 자주외교라는 논리는 허구로 가득한 논리임을 직시해야 한다. 한미
외교문제를 다루는데 5:5의 지분을 요구하는 것은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전
혀 무시하는 허구요 비진실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와 후진국인 어떤 나라와 외교협정을 체결한다고 할 때 5:5
의 지분을 요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수용하겠는가? 진정한 한미 자주외교란 
3:7의 현실을 인정하고 우리가 3을 어떻게 극대화시킬 것인가를 위해 국력을 
모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주외교인 것이다. 외교적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
에게 5:5의 명분은 기분 좋은 발상일 따름이다. 그것은 민중에 대한 기만 외
에 아무것도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민감한 문제지만 정치자금에 대한 단죄도 마찬가지이다. 불법선거자금 모금과
정에서 노무현 캠프가 이회창 캠프보다 도덕성이 탁월했기 때문에 십분
의 일
만 쓴 것인지 혹은 모금 능력이 그 정도 밖에 안됐기 때문에 그 정도 밖에 
못 쓴 것인지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돼지저금통만 가지고 선거를 치렀다고 
선전할 때는 언제이고 우리는 당신들 보다 덜 썼기 때문에 더 깨끗하다는 논
리는 또 무엇인가? 한나라당을 비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의 개혁논리가 허
구와 선동성으로 가득 찬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기독교는 수구세력이 되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개혁만능의 허구성도 직시해야 
한다. 개혁은 과거의 아픈 역사를 함께 책임지고 국민통합의 기저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이루어낼 과제이다. 정치문화를 바꾸고 정치 체제를 바
꾸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한쪽의 잘못은 덮어둔 체 한쪽의 잘못만을 확대
해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선전하는 것이 선동이다.

급진적 개혁주의 안에 내포되어 있는 선동주의를 직시하고 역사발전의 균형 
추 역할을 감당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