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개혁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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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개혁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대의 문필가요 탁월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인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 1469-1527), 지금은 비록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
에 한줌의 흙으로 누워있지만 그가 남긴 시대적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그가 남긴 상대적 가치의 ‘유용성’과 목적을 위한 ‘이기적 도덕
률’의 허용은 세속과 교회를 가리지 않고 맹위를 떨치고 있다. 변화하는 시
대적 요구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면죄부를 허락한 그를 우리 
시대가 가장 순수하고 진솔한 정치사상가로 평가하는 것은 시대적 아이러니
이다. 

그의 영향 아래 악명 높은 르네상스의 교황들인 식스투스 4세(Sixtus PP. 
IV, 1471-1484),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 레오 10세(Leo X, 
1475-1521)가 어떤 인물들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주님의 교회’에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 잊어선 안 된다. 르네상스의 건축과 미술의 아름다움에 매
료되어 그들이 주님의 교회를 파괴
하고 타락의 깊은 심연(深淵)으로 빠져들
게 했었다는 역사를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교황의 통치아래 있던 이 시대 교회는 더 이상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도구
가 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은혜가 미치는 일반 시민사회
의 전 영역들을 마비시키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무서운 과거의 교훈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군주론의 주장처럼 난세(亂世)에는 어떻게 군주가 권력을 쟁취하고 그 권력
을 쟁취하기 위한 달성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권력달성에 성
공했느냐, 실패했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
능하고 도덕과 ‘말씀’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근대의 새로운 길
을 열었다. 당시에는 어색하기 그지없던 가치들이 근대를 거쳐 우리 시대에
는 보편화되고 말았다. 

탁월한 리더십의 결정체로 인정받는 반동종교개혁적 가치들은 급기야 오늘
날 교회에 흘러들어 아주 자연스럽게 ‘계시’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유용성’이란 명분 아래 ‘수단과 방법’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은 결코 개혁교회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고이자 표현이다. 소
위 ‘실
용성’과 ‘유용성’의 폭에 따른 ‘역사적 개혁주의’에 대한 평가는 절대
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저급한 교회성장론을 앞세우며 개혁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소위 대형
교회로 맹위를 떨치는 몇몇 목사들은 “개혁주의가 무엇이냐?”라고 반문하
기도 하며, “신학생 때부터 개혁주의로 부흥한 교회가 없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하고, 나름대로의 노력으로 오늘날 대형교회를 이루었노라”고 자신의 
소회(所懷)를 피력하기도 한다. 

사실 이들의 주장처럼 개혁주의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
의 신학적 이론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이렇게 ‘개혁주의’에 
대한 나름의 변증과 한탄할 이유조차 없을 것이다. 일선 목회현장의 따가운 
눈총을 거스르지 못하며 그 도구적 헤게모니 속에 녹아버린 한국 교회와 신
학의 현주소는 가히 절망적 수준이다.

오늘날 개혁교회라 일컫는 많은 교회들이 ‘말씀중심’에서 ‘이성과 경험중
심’으로 옮겨가고 있다. 또한 계시된 말씀의 절대성을 신앙하는 개혁주의 
교인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한 세대 전 만해도 이런 저급한 견해들
이 냉소의 
대상이 되었지만 오늘날 우리의 형편은 그렇지 못하다. 

주님의 교회 안에 깊이 자리잡은 마키아벨리식 교회관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
다. 이러한 형식적 개혁주의에 대한 평가는 이미 여러 곳에서 경계된 바 있
다. 무익한 전쟁과 성 베드로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의 판매, 축첩과 사치
와 방탕으로 얼룩진 성직자들의 사생활 등 유린된 교회의 모습은 빛 바랜 추
억과 역사 교과서의 편린이 아니다. 

시대적으로 마카아벨리가 주목한 ‘유용성’은 정합성(整合性)이 있는 것처
럼 보였지만 ‘역사적 개혁주의’와는 반대의 길에 서 있음이 분명하다. 오
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성장’을 빌미로 마키아벨리식 ‘유용성’을 차용
하고 급기야 ‘개혁주의의 실패’를 운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를 경계하지 못하면 한국교회는 영원히 ‘역사적 개혁주의’와 결별하게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와 동일한 시대를 보냈던 개혁주의자들의 ‘계시 
의존적’ 삶에 돌려지는 평가를 듣고 있노라면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 없
다. 우리 시대 개혁주의 교회라 일컬어지는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
씀’에서 눈을 돌
려 시대적 ‘유용성’을 쫓아가는 세태 속에 빠져들고 있
다.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삶이 고리타분하게 보이며 비효율적이
고, 비합리적으로 비춰지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이러한 마키아벨리식 ‘유용성’을 쫓아가는 무감각한 많은 교회들
을 보면서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주의’가 유용성의 잣
대로 시대의 평가를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는 시대를 쫓아가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교회들은 불과 500년 전 종교개혁전야에 개혁자들이 흘린 피와 땀
을 잊고 있지 않는가 깊이 성찰할 일이다.